‘자아’와 ‘주체’는 무엇이며 어떻게 형성되는가?
‘자아’와 ‘주체’는 무엇이며 어떻게 형성되는가?
[라캉]
라캉에 따르면 거울 속 이미지를 자기 자신이라고 오인하는 이 과정을 ‘에고’라고 불리는 자아를 형성하는 것으로 보았는데, 왜 라캉은 ‘오인’이라고 표현하는 것인가?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은 자기 자신이 아닌가? 거울 속에서 보는 존재가 바로 ‘I’로 규정될 수 있는 ‘자아(Ego)’라 고 한다면 여기서 말하는 에고는 실체적 존재, 즉 거울에 비치는 형상 그대로인 모습을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거울에 비친 외형적이고 실체적인 모습(‘저게 너야’라고 강요된 오인) 말고 내적인 또 다른 ‘자아’를 구분하는 것인가?
거울에 비친 이미지를 아이가 상상적으로 동일시하는 과정(상상계 영역)을 통해 자아가 만들어진다고 본다면 즉, 거울에 비친 ‘I’의 모습은 자아가 아니라 존재적 실체를 ‘인지’하게 되는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 맞겠다. 그럼 자아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존재적 실체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자아’라고 해석하면 되는 것인가. 라캉은 자아는 상상계에 속하고 주체는 상징계에 속한다고 한다.
타자=또 다른 존재일 때
아이는 타자라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자아를 형성한다. 그러나 그렇게 형성된 자아를 성숙된 자아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수 있겠다. 왜냐면 타자는 하나로 규정된 형체가 아니라 수많은 형체들이기 때문에 아이가 보는 타자의 성격이나 유형에 따라 아이의 자아를 규정하는 척도나 성숙이 달라지겠다. 이때 아이에게 가장 중요한 타자 또는 가장 먼저 보는 타자는 곧 엄마가 된다.
라캉은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룰’, ‘법칙/규율’을 설명하는데, 즉 언어에 대한 복종은 곧 부성의 법칙을 의미하며 이는 상징적 질서로의 진입을 의미한다면 아이는 결국 부성으로 상징되는 사회적 질서의 구조화된 원리를 위협 혹은 두려움을 통해서 터득한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더 나아가 사회의 질서를 아버지라는 타자를 통해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사회는 보다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이게 되는 것인가? 부성이라는 위협 혹은 두려움의 상징 때문인가?
또한 아이가 엄마로부터 분리되어 독립된 정체성을 형성해야만 한다. 이를 곧 문명/문화에 진입함을 의미하는데, 왜 이를 (원초적) ‘비극’이라고 설명하는 것인가? 해석에 따르면 성인이 되는 과정에서 모성으로부터 분리되는 과정을 경험하는 단계이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기존의 보호자였던 모성과 분리되면서 모성이 사라지기 때문에 비극이라고 하는 것인가?
모성에서 떠나 ‘자아’를 형성하는 ‘주체’적 인간으로 성장하는 영역을 성숙으로 보면 되는 것인가? 알튀세르에 의하면 인간은 사회적 실천을 수행하지만 역사 속의 행위자이지 주체는 아니라고 한다. 인간이 역사 속에서 주체가 될 수 없는 것인가? 이데올로기에(사회 관계) 의해 ‘투쟁’이 역사에서 주체가 된다면, 인간은 ‘주체’를 이데올로기(사회 관계)와 엮이기 위해서(투쟁하기 위해?) 찾는 것인가?
인간은 오로지 이데올로기라는 재현 체계의 매개를 통해서 역사적 존재 조건과 관계를 맺는다면, 즉 이 말은 인간은 사회적 이데올로기(사회 관계) 안에서만 주체적으로 자유롭다는 말과 일맥상통하게 되는 것인가? 외부 세계와 엮이지 않고는 인간이 ‘자아’와 ‘주체’를 형성할 수 없다는 것인가? 라캉도 질서와 법의 효과가 아이의 탄생 이전부터 아이가 태어나길 기다려 아이가 첫 울음을 우는 순간부터 아이를 포획하여 그 아이에게 위치와 역할 따라서 강요된 운명을 배정해준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그렇다면 라캉이나 알튀세르 둘 다 아이의 ‘주체’형성은 사회적 관계(이데올로기)에 엮일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알튀세르]
“알튀세르에게 있어서 주체가 이데올로기적인 언어, 즉 상징 질서에 철저히 예속된 구조적 효과에 불과하다면 라캉에게 있어서 주체는 의식 혹은 무의식의 기표의 사슬의 구속에서 필연적으로 벗어나 의미 사슬의 틈새에서 존재의 당위성을 확보하는 무의식적 주체인 것이다”라면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 안에서 주체가 형성된다는 것이고, 라캉은 이 이데올리기를 벗어나 ‘틈새’에서의 존재를 찾아 확보하는 무의식적인 것을 주체라고 하는 것이다.
알튀세르의 ‘주체’관보다는 라캉의 ‘주체’관이 조금 더 이해가 안 되지만 더 잘 받아들여진다. 왜냐면 알튀세르의 ‘주체’는 이데올로기에 엮여서만 설명된다면 자유로운 주체관이 아닌 듯하다. 즉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반면 라캉의 ‘주체’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맞는다면, 이데올로기를 벗어나려는 노력 속에서 존재의 당위성을 찾는 과정을 ‘주체’를 확보하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인간이 ‘자유로운’의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는 단서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데올로기에 엮여서만 ‘주체’를 설명할 수 있다는 알튀세르의 해석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분명 나 자신의 주체도 이 이데올로기(사회 관계)에 엮여서 작동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데올로기에 엮인 주체’로서의 설명보다 자유로워지려면 외적인 세계, 즉 신과 나의 관계에서 주체를 형성하는 방법이 있겠다. 즉 신과 나 사이에서 나의 자아와 주체를 형성하는 것이다. 근데 이는 ‘신앙’이라는 영역 안에서만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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