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그는 누구인가?

안중근, 그는 누구인가?




(2012)

1. 안중근, 그는 누구인가?





현재 우리의 삶속에교과서속의 영웅으로 전락한  안중근,  100년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역사앞에 당당히 평화를 위해 총을 겨눈 영웅, 우리는 안중근을 통해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안중근, 자신은 우리 후대들이 무엇을 얻기를 원했는가. 단지 평화를 원했던 인간, 1세기가 지난 지금 우리는 안중근이 그렇게 바랬던 평화를 누리고 있는가.

안중근과 같은 우리의 영웅보단 체게바라 초상이 그려진 옷을 입고 다니는 우리 지금의 세대, 한글보단 영어가 쓰여진, 뜻도 모른채, 옷을 입고다니는 우리의 지금 세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는가. 과거 우리 역사를 돌아보고 선대들이 이루고자 했던 , 지금 우리 후대가 선대들을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가. 지난 역사가 없고야 어찌 미래가 있겠는가.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던 선대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배우는 것이 우리 후대들이 당연히 해야되는 것임을 우리 스스로가 알때 비로서 스스로 미래를 업고가는 후대들이라고 당당히 설수 있을 것이다. 1세기전 우리 후대를 위해 죽음앞에 당당했던 영웅 안중근을 깊이 살펴보자.


2. 번개입어린장군 안중근


성질이 가볍고 급한 편이어서중근이라는 이름을 지었고, 가슴과 배에 일곱 개의 검은 점이 있어서응칠이라고 불린 안중근, 그의 어린시절 또한 남다르다. 현감 할아버지 안인수와 진사 아버지 안태훈 슬하에서 3 1 맏이로 태어난 안중근, 그의 출생 또한 특별한 전승일화가 있다. 어머니 조마리아는 꿈에 건방에 일곱 개의 기이한 별이 나타나 상서로운 빛이 찬란한 몽조가 있었는데, 그날부터 태기가 있어 1879 7 16일에 마침내 안중근을 낳았다는 친족들 사이에서 전승되던 일화가 있다. 아마 여기서 7 별이 안중근의 몸에 있는 일곱개의 검은 점이 아닌가 싶다.


황해도 해주부의 수양산 아래에서 태어난 안중근은 현감이었던 할아버지와 신동으로 소문났던 진사 아버지 안태훈의 부유한 집에서 자랐다.


박은식은 안중근이 남달리 총명하여 경전과 역사에 통달하고 서예에 뛰어났으며, 때는 반드시 활을 끼고 총을 잡았고, 타기를 익혔다고 했다. 따라서 솜씨가 뛰어나서 말을 나는 새를 쏘아 떨어뜨릴 있었다고 묘사했다. 문무 양쪽에서 모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안중근의 가족배경에서도 찾아볼 있다. 무과에서 문과로 변화를 꾀해던 가문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무모하면서도 때로는 침착하고 담대했던 안중근은 사냥을 유별나게 좋아했다. 안중근은 평생동안 특별히 즐기던 것이 있다. 첫째는 벗을 사귀는 것이고, 둘째는 음주가무요, 셋째는 사냥이고, 넷째는 말달리기 였다.특히 그는 음주가무를 즐겼는데 예로 안중근은 기생집에서 놀다가 기생들에게 욕을 붓거나 매질도 하곤 했다고 스스로 적었다. 이렇게 거침없었던 안중근에게 친구들은번개입이라는 별명까지 붙혀주었다.


안중근이 16 되던 1894 우리 역사에서 커다란 전환점이 마련된 시기였다. 이때 동학농민전쟁이 있었는데 안중군은 아버지 안태훈이 일으킨의병 일원으로 전쟁에 참여했다. 박은식은 5척도 되지 않는 작은 소년으로 놀라운 사격술을 선보여서 적들로부터하늘에서 내려준 홍의장군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안중근이 참여했던의병군은 바로 동학군들과 싸웠다는 것이다. 이것은 논란의 여지를 가지고 있다. 당시 동학군은 모두가 인간 차별이 없는 인내천의 세상, 타락하고 썩은 벼슬아치들을 몰아낸 세상 건설을 위해 일어났는데, 안중근의의병군 러한 동학군과 싸웠다는 얘기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해야 점은 어떠한 동학군이었는지이다. 개화파에 속했던 안태훈을 성격과척왜척화 주장하던 동학군과 조금 이념적인 차이를 보일수 있다. 안중근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안중근이의병으로서 대적했던 동학당() 외국인을 배척한다고 칭탁하면서 고을마다 횡행하고 관리들을 살해하고 백성의 재물을 약탈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관군이 진압할 없었으므로 청나라 군사가 건너왔고, 일본군사가 건너왔는데 일본과 청나라가 충돌하니 반드시 전쟁이 일어날 했다고 회고했다. 따라서 아버지 안태훈이 동학당의 포악한 행동을 참을수 없어 의병을 이르켰다. 그러나 의병군 마을과 고을을 지키는 것이 기본 명분이었다. 동학당은 일진회의 뿌리이며 뒷날 동학당의 활동이 - - 사이의 전쟁을 불러오는 빌미가 되었다는 것이 안태훈의 이념이 섞인 생각이었다. 하지만 나아가 안태훈의 이념은 동학군들과는 달랐다. 이때 황해도 동학농민군의 우두머리 가운데 김창수라는 아기접주가 있었는데 바로 김구였다. 안태훈은 동학군에 몸담고 있는 김구의 재주를 높이 평가하여 김구의 부대는 공격하지 않겠다는 뜻을 보인바있다. 따라서 김구와 서로 침범하지 않고 돕기까지 하는 동맹도 맺게된다. 개화파에 속하면서도 외세에 대한 경계심을 갖고 있었으므로 장차 외세를 막기 위해서 김구 같은 젊은 인재를 특별히 보존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이다. 이렇게 안태훈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안중근 또한 아버지의 밑에서 영향을 받고 받았기 때문에 동일한 관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3. 민권 꿈꾼 천주교인 안중근


안태훈가문이 천주교에 입교한 것은 안태훈이 어윤중과 민영준의 계교를 피해 프랑스 사람들의 도움을 받고 교당안에 오래 며물며 강론도 듣고 성서도 읽으면서 진리에 감동하여 입교한 것이다. 이후 복음을 전파하고자 교회의 박학사 바오로와 함께 많은 경서를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일전에 고산림이라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김구를 불러 글을 가르치기도 했던 인물로 안태훈과 동학군에 대한 공통점이 있었지만 사상적으로는 성향이 달랐다. 고산림은 안태훈이 천주학을 해서 서양 오랑캐에 의지하고 의뢰할 마음이 있다면 이는 결국 대의에 위반된 행동이라고 판단하고 결국 안태훈과 절교한다. 여기서 볼수 있듯이 개화파에 속했던 안태훈은 천주교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안태훈의 복음적 노력으로 많은 청계동 사람들이 세례를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1897 1 안태훈 일족ㅇㄹ 포함한 청계동 주민 33명이 세례를 받았고, 같은 4 부활절에 다시 66명이 세례를 받았다. 개화사상을 품었던 선비 안태훈이 이렇게 자신 친족의 기반을 천주교로 전환하였다. 하지만 천주교로 전환한 이유에 대해서는 고산림과 의견충돌이 있을때 안태훈이 천주교를 믿다가 기회를 보아 훗날을 도모하겠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안태훈은 교당안에 있으면서 신앙의 진리에 감동하여 믿게되었다. 앞날을 도모하기 위함보다는 실제로 개인의 신앙심으로 인한것이었다. 


안중근에게 세례를 인물은 빌렘신부이며 홍석구라는 한국식 이름을 가진 알자스로렌의 슈파이헤른에서 태어났다. 안중근은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여 천주교인이 것이 아니라 진리에 감동하여 천주교인이 것이다. 안중근은 빌렘신부의 복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안중근의 세레명은 토마스, 도마이다. 뒷날 신문 기록에서 나오지만 안중근은아시아까지 나와 종교를 선포한 사람 토마스 같이 되고싶다는 소망도 있었던 것이다. 안중근의 생애에서 천주교는 크게 작용한다. 또한 안중근은 생애 마지막까지 선교를 했다. 특히 뒤에서도 다루겠지만 안중근의 마음속에는이상적인 법률 대한 신뢰와현실의 범률 대한 불신이 있었다. 민권과 자유, 그리고 문명 독립국을 꿈꾸었다. 이것은 천주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다.


안중근은 빌렘신부에게서 프랑스어를 배우면서 학문에 대한 포부를 가졌다. 안중근은 뮈텔주교를 만나 학문을 가르칠 대학의 설립을 건의했다. 하지만 오히려한국인이 학문을 얻게된다면, 천주교를 믿는 좋지 않으니 다시는 이런얘기 꺼내지 말라 말만 들었다. 안중근은 분에 차서천주교의 진리는 믿을 만하지만 외국인의 심정은 믿을수 없다 맹세하기도 했다. 천주교에서 지향하는 진리는 보편적인 것인 반해, 천주교인의 국적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다. 종교의 진리는 공유할 있지만 국가나 민족의 이익은 공유할 수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이것은 파리외방전교회의 방침과 관련된 것이다. 실제로 당시에는 선교목적의 선교사들이 있었지만 또한 정부에서 파견한 선교사들 일종의 정부의 이익을 대변하는 선교사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안중근은 실제로  신실한 천주교인이었다. 대한독립의 민족운동가였던 동시에 그는 선교사였다. 안중근은 자주 교리를 설교하기도 했으며 그의 영향을 받은사람들도 있다. 이토를 저격하러 할빈으로 향하던 길에서 안중근은 우덕순과 조도선에게 교리에 대해 설명하고 그들이 그의 교리를 받아들이기도 했다. 안중근은 그의 재판후 마지막 사형장에서 2분간의 묵도를 하든 그의 신앙은 깊었다.


4. 인간으로서의 안중근: 그의독특한가치관


안중근, 과연 그의 가치관은 특별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인간으로서의 안중근은 그의 대한독립에 대한 의지와 더불의 그의 깊은 신앙심에서 정립되는 가치관이었다. 일전에 의병활동을 할때에 일본군 포로를 잡았을때도, 다른 의병들의 목적은 가능한한 많은 일본군을 죽이는 것이었지만 안중근은 달랐다. 그의 목적은 죽이는 것이 아니라 알리는 것이었다. 또한 그의 국가관 또한 신앙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안중근은 자신이 교리를 설교할때 자주 마테오 리치의천주실의 나타나는삼부론 가군, 국군, 천주를 대비함으로써 신앙적 교리와 국가관을 비교하기도 했다.


5. 대한국 의병 참모중장안중근


안중근은 어릴적부터 의병활동에 몸을 담았었다. 특히 안중근의 의병활동은 일반적으로 적들을 가능한한 죽이는 목적이 아니었다. 위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안중근은 힘들게 잡은 포로들을 돌려보내며 심지의 그들을 걱정하며 무기까지 돌려주는 그를 따르는 의병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한다. 여기에서 볼수 있는 것은 안중근의 일본에 대한 관점이다. 뒤에서도 다루겠지만 안중근을 비롯한 아버지 안태훈은 개화파에 속하며 척외강경론자는 아니었다. 안중근은 일본의 조선(대한국) 대한 침탈을 일반적인 관점이 아닌 그의 독특한 가치관과 생각으로 본다. 안중근은 자신의 의병활동을 단순의병 아닌 대한국의 정규군으로서의 자격을 갖춘의병군이라 주장했다. 체계를 갖추지 않은 난잡한 의병군이 아니라 국가를 대변하는 의병군이었고 자신은 의병군의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단순한 복수의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국가를 대변한 정의의 행동으로 생각했다.


6. 안중근의 : 이토 히로부미


안중근의 마지막 최대의 적은 이토 히로부미였다. 그를 처단한 것에서 알수 있지만, 안중근은 의병활동을 할때도 이토 히로부미를 처벌하기 위함이었다. 일전에 일본군 포로를 잡았을때도 안중근은 포로들을 놓아주면서 일본을 패방의 길로 끌고 가는 자가 이토라며 일본인 스스로 단결하여 이토를 처단해야 한다며 포로들에게 사실을 알고 행하라고 보내주었다. 이토가 일본 천왕을 속이고 자신의 야욕을 위해서 독자적으로 한국을 강제 침탈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안중근은 바로 이토 히로부미를 최대의 적으로 생각했다. 안중근을 비롯해 안태환은 일본에 대해 다소 호의적은 생각을 가졌음을 알수 있다. 안중근은 일본제국과 천왕이 주장한 한국의 동양평화를 어느정도 지지했음을 알수 있다. 그래서 안중근은 이토가 천왕을 속이고 한국의 동양평화를 무시하고 자신의 야욕을 위해서 대한국을 침탈한다고 생각했다.당시 개화파에 속했다고 하지만 역시 조금 독특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수 있다. 안중근은 이토 한사람을 적으로 목표했을까, 그것은 아무래도 안중근 자신이 가지고 있던 이념과 신념에 대한 확신이 있었고 주변 열강들에 대한 한국에 대한 표면적인 정책을 신뢰했음을 짐작할수 있다. 안중근이 이토의 죄목중 하나로 천왕을 속이고 동양의 평화를 깨뜨리고 자신의 야욕을 앞세운 죄를 지목한 종합해보면 안중근 자신만의 기준과 신념이 이었음이 틀림없다. 


7. 숙적 이토와의 숙명적 만남


안중근은 대동공보사에서 얘기하더중 사람을 통하여 이토가 하얼빈으로 온다는 소식을 접한다. 이때 다른 사람이 이토를 암살하기 좋은 때라고 말하자 사장 미하일로프가 그에 동의한다. 이렇게 짧은 대화속에서 이토를 암살할 우연한 모의가 마련된다. 이때 안중근은 자신이 이토를 암살할 임무를 맡겠다고 한다. 이렇게 결정된 이토의 암살계획, 운명의 임무가 안중근에게 맡겨진다. 우덕순, 조도선과 함께 이토를 만나러 하얼빈으로 가는길에 우덕순과 안중근은 비장의 노래를 짓기도 했다. 1909 10 26 아침 9시에 이토가 하얼빈역으로 도착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안중근과 우덕순, 하지만 계획의 성사를 위해 우덕순은 차이자거우에 머물고 결국 안중근 혼자 하얼빈으로 향한다.  운명의 시간이 다가오는 아침 9, 환영행렬 가운데 기차에서 내리는 이토 히로부미, 찻집에 앉아서 때를 기다리던 안중근, 운명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이토의 얼굴을 몰랐던 안중근은 터벅터벅 환영핼렬 뒤로 걸어가저것이 필히 늙은 도적 이토일 것이다하고작고여윈 흰수염의 늙은이를 향해 4번의 방아쇠를 당겼다. 하지만 이토의 얼굴을 몰랐던 안중근, 바로 혹시나 뒤에 따르던 일본관료를 향해 3발을 쏜다.대한만세 세번 외친 안중근, 그의 숙적 이토가 그의앞에서 쓰러졌다. 바로 잡힌 안중근은 끌려갔지만 그의 신념에 행동은 그를 잡혔지만 당당하게 만들었다.


8. 이토의 죄명


이토 처단후 안중근은 감옥으로 끌려갔다. 하루만에 일본 영사관에 넘겨진 안중근은 이후 일본 측으로부터 본격적인 신문을 받는다. 이토의 죄상을 널리 알리는 목표를 두었던 안중근은 신문기록에서 이토의 죄목을 15개로 정리해서 밝힌다.


(1) 한국 민황후를 시해한 죄요

(2) 한국 황제를 폐위시킨 죄요

(3)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요

(4)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요

(5)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요

(6) 철도, 광산, 산림, 천택을 강제로 빼앗은 죄요

(7)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유통시킨 죄요

(8) 군대를 해산한 죄요

(9) 교육을 방해한 죄요

(10) 한국인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킨 죄요

(11)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버린 죄요

(12) ‘한국인은 일본의 보호를 받기 원한다 세계를 속인 죄요

(13) 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경쟁과 살육이 끊이지 않고 있는데도 한국이 태평무사한 것처러 위로 천황을 속인 죄요

(14) 동양평화를 파괴한 죄요, 15. 일본 천황 폐하의 부황인 태황제를 시해한 죄이다.


이에 신문하던 검찰관이이제 진술을 들으니 가히동양의 의사 만하다. 그대는 의사이니 분명 사형을 당할 법은 없을 것이다. 걱정하지마라라고 했다고 안중근은 회고한다.

이에 안중근은 이렇게 대답한다. 


내가 죽고 사는 것은 논할 없다. 뜻을 속히 일본 천황 폐하께 아뢰어 속히 이토의 옳지 못한 정략을 고침으로써 동양의 위급한 대세를 바로잡기를 간절히 바란다. 


부분은 안중근을 특별한 존재로 만드는 이유이다.  안중근, 그의 가치관과 신념을 볼수있는 부분이다. 안중근은 자신의 회고에서 직접 밝히듯이 본인의 적은 이토였다. 그리고 처단한 명분은 바로 위에 열거한 이토의 죄목을 천황께 알리고 세상에 알리는 것이었다. 최소한 안중근은 일본 천황을 신뢰한다고 볼수 있는 대목이다. 신뢰한다는 표현은 다른말로 이토와는 달리 침략의 의지를 갖지않은 동양의 평화를 지향하는 군주로 받아들인다는 분석이다. 과연 안중근만의 가치관과 정세분석, 그의 신념으로 보는 것이다.


9. 안중근의 이토와 일본제국과 천왕에 대한 이해


개화파에 속했던 아버지 안태훈의 영향을 받은 안중근 역시 개화파에 가까웠다. 천주교인이었던 안중근, 그의 교리관과 깊은 관련이 있는 그의 가치관과 신념은 독특하게 표출된다. 대한국의 숙적을 이토 한사람으로 지목한 또한 안중근을 독특하게 만드는 이유이다. 일본제국 전체를 숙적으로 보는 일반적이었던 관점을 보면 안중근은 조금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대한국의 숙적은 이토이지만 일본천황과 일본국민에 대해서는 거의 전혀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던 같다. 이토의 죄목을 나열한 중에 이토가 일본 천황을 속였다는 조금 의아한 죄목이다. 부분은 안중근이 당시 일본천황이 대외명분으로 내세웠던 동양의 평화와 한국의 평화를 보장할 것이라는 것에 대한 신뢰 혹은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천황의 명을 이토가 속여서 야욕을 채우기 위해 한국을 침탈한다는 것이다. 이토와 천왕을 다른 관점에서 보았다는 것이다. 안중근이 일본에 대해 어느정도 호의적인 생각을 가질수 있었던 데는 아버지 안태훈의 영향도 있고 천주교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크게는 안중근 개인의 신념의 차이일 것이다.


10. 정치적 확신범 만국공법


안중근은 사건의 해결방법이나 문제를 저리할때재판이라는 법의 테두리안에 있는 도구를 통해서 해결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위에서도 살짝 언급했듯이 안중근은이상적인 법률’, 제도에 대한 신념이 있었다. 고을에서 사건을 해결할때도 안중근은 재판을 통하여 해결방안을 모색하였다.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 처단후 일본 영사관에서 신문받으면서 곧장 자신이정치적 확신범임을 주장했다. 그리고 만국공법에 따라 대우하라고 주장했다. 안중근이 사리를 위해 행동한 것이 아님이 분명했기 때문에정치적 확신범으로 인정된다면 사형이 선고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안중근의 6회의 공판과정에서 다국적 변호사 6명을 선임하기로 되어있지만 결국 일본 정부의 정당한 대우로 결국 일본인 변호사 2명만 선임된 상태에서 선고를 받아야 했다. 안중근은 계속 자신이 한국의병 참모중장 자격으로 했기 때문에 당연히 전쟁포로로 취급해야 되며 만국공법에 따라 처리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일본측에서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사적인 일로 몰아부치면서정치적 확신범으로 될것을 염려했다. 


안중근은 만국공법국제공법 거론했을까? 물론 안중근 스스로 그러한 적용이 옳다고 생각했겠지만, 안중근 스스로 법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일본인에 대한 신뢰 혹은 믿음 혹은 기대가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안중근 스스로 이토 한사람을 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안중근이 이토를 처단한 목적은 단순히 이토를 죽이면 해결되리라는 기대가 아니라, 안중근이 가지고 있던 목적을 이루기위한 수단으로 사용한 것이다.  여기서 안중근의 목적은 바로 그가 감옥에 있으면서 죽기전까지 집필하던동양평화론 동양의 평화이다. 바로 이토의 죄를 고발함을 계기로 일본인들에게 호소하려고 했던 것이다. 또한 안중근은 그의 기록안응칠역사에서 밝혔듯이 일본인들 또한 자신과 같이 동양의 평화를 바란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또한 안중근은 일본인들도 자신과 같이 이토를 미워하는 아는 오류를 범했던 같다. 또한 일본 천황이 죄인 이토를 죽인 자신을 가상하게 여길거라는 믿음 혹은 기대까지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안중근이 일본제국의 한국 침략에 대한 야망을 잘못 이해한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일본은 한국을 집어 삼켰다. 안중근의 믿음처럼 일본 천왕과 일본 국민들이 동양의 평화를 원했다면 죄인 이토를 처단한 안중근은 세계역사에 남을 위대한 위인 안중근이 되겠지만 결국 냉철한 평가로 보면 안중근의 일본에 대한 이해가 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중근의 이러한 정세분석 오차에도 불구하고 그의 행동은 역사의 획을 달리 긋는 사건이었다. 이것을 계기로 대한국에서 독립에 대한 운동이 활발해지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11. 후대에 맡겨진 미완성의동양평화론 


안중근이 그토록 바랬던 동양의 평화는 무엇이었는가. 안중근의 최후진술의 마지막 부분을 살펴보자. 


일본인으로서도 그러하거늘(동양의 평화를 희망하고 있는 동시에 간신 이토를 얼마나 미워하는지-안중근은 일본인들도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한다고 생각했다-역주), 하물며 한국인으로서는 친척이나 벗을 죽인 이토를 미워하지 않을 까닭이 없다. 내가 이토를 죽인 이유는 이토가 있으면 동양평화를 어지럽게 하고 한국과 일본의 사이를 소원하게 하므로 한국의 의병 중장의 자격으로 주살하엿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한국과 일본이 친밀하게 되고 평화롭게 다스렸다면, 나아가서는 5대주에도 모범을 보여줄 것을 희망하고 있었다. 걸코 나는 오해하고 죽인 것이 아니다.그런 까닭에 이제 이토가 시정 방침을 그리치고 있었다는 것을 일본 천황이 들었다면 반드시 나를 가상하게 여길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이후에 일본 천황의 뜻에 따라 한국에 대한 시정 방침을 개선한다면 한국과 일본 사이의 평화는 만세에 유지될 것이며, 나는 그것을 희망하고있다. 


안중근이 천황을 포함한 일본인에게 당부한 바는평화 요약할 있다. 한국과 일본이 평화를 유지하는 모범을 보이도록 요청하고 있다. 안중근은 자신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일본인에게도 손실이 것이라고 여겼다. “일본국 4천만이안중근의 크게 외칠 날이 멀지 않았다라고 까닭도 바로 그러한 자신감과 안타까움의 동시적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재판은 안중근이 바랬던 만국공법에 의한 재판이 아니라 일본의 일방적인 사형선고이기때문에 결국 안중근 자신이인약한 한국 인민의 성품은 어질면서도 힘은 약한 민족에 속한 죄를 범한대죄인이었음을 깨닫고는 웃고만다.


안중근은 어떻게 이런 생각을 있었을까. 가장크게 작동한 것은 바로 안중근이 가지고 있었던 가치관과 일본에 대한 개인적인 믿음, 신뢰 혹은 기대가 크게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안중근이 구상한동양평화론에서 일본의 급선무로저정의 정리 지목했다. 그는 우선 재정을 길러서 나라를 튼튼하게 해야만 다른 문제를 해결할 있다고 했다. 한국, 청국, 일본이 연합할동양평화회의 구상에서도 회원 1인당 1원씩의 회비 모금을 가장 먼저 내세웠다. 안중근의동양평화론 안중근이 사형받으면서 미완성으로 남겨졌다. 하지만 짐작해볼때 구상은 동양 3 공동체까지임을 알수 있다. 안중근과 일본 대법원장 히라이시와의 대화중에 안중근의 말에 히라이시가정부 주권의 기관은 고치기 어려운 등을 볼때 추론할 있다. 안중근은 심문 경찰관 들에게 ‘…마음을 합하여 동양의 평화를 기도하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라고 진술하였다. 안중근은 마지막 순간에도 거듭동양의 평화 강조한 것은 그의 진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마음과 힘을 합해달라 당부한 것은 동양의 평화가 어느 국가의 노력만으로 달성될 없는 목표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안중근은 일본에 대한 개인의 믿음 혹은 신뢰, 기대가 있었기 때문에 동양평화를 이룩하는데 일본의 역할을 크게 보았다. 심지어 -일전쟁때 일본이 이기길 바라는 모습도 엿볼수 있다.


이렇게 동양( , , ) 평화를 바랬던 안중근, 하지만 완성하지 못한채 떠나야 했던 안중근, 과연 그의 동양평화론은 실현가능한 것인가는 우리 후대가 냉철하게 평가하고 연구해야할 가치있는 것일 것이다. 


12. 영웅안중근과 현재 우리의 사회상


외세의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한지 이제 1세기도 안되는 지금, 이젠 외세화(서구화) 되어가고 있는 현실이다. 척왜척화를 외치던 선조들, 외세의 문물이 나쁜 것이어서가 아니라 당시의 침략적인 외세의 힘을 거부했던 선조들이다. 개화파에 속해있던 안중근, 그는 외세에 비교적 호의적이었다.하지만 침략은 거부했던 그는 평화를 위해 총을 겨누었다.때가 영웅을 만듦이여, 영웅이 때를 만듦이여라고 했던 안중근, 그의 죽음앞에서의 당당함은 결국 후대에 남겨 지금 우리가 배우고 있는 것이다. 대의를 위한 그의 희생,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가. 현재 우리는 안중근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안중근을 비롯한 당시의 독립투쟁 의사들을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 우리 스스로 피판적으로 생각해봐야 것이다. 현재 우리는 당시 독립투쟁영웅들을 아직까지도 제대로 연구하지 못하고 그들의 대의를 밝히는데 저조하고 있다. 심지어 친일을 죄인을 독립투사라 하여 기리는 오류까지 범하고 있는 현실이다. 교과서에 서구, 유럽의 위인들은 많이 읽고 접하지만 사실 한국의 독립투사들에 대한 관심은 별로 없는 것이 현실이다. 체게바라와 같은 인물은 심지어 상품화 되기까지 그에 대한 관심과 노력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우리는 어떤가, 서구화 되어간다는 비판이 곳곳에서 들릴만큼 명백해지는 상황, 물론 서구화가 전부 나쁜것이라는 주장은 무리가 있겠지만, 우리의 것을 지키지 않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일 것이다. 특히 현재 한국사회에 팽패해진 서구중심주의, 서구 스타일을 따라가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우리의 것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스스로의 역사를 모르고서야 어찌 우리의 미래가 있다고 할수 있겠는가. 영어가 새겨진 옷들은 많아도 한글이 새겨진 옷은 거의 없는것이 현실이 아닌가, 왠지한글로 것은 촌스러워 보인다는 심히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현재 우리의 모습이 아니던가.


안중근이 바랬던 평화, 우리는 얼마나 추구하고 있는가, 지금은 평화로운가, --일은 과연 평화로운가 지금. 현재의 한중관계, 한일관계는 평화로운가. 안중근이 그렇게 강조했던마음을 합하는 우리는 하고있는가. 일찌기 안중근이 꼬집었던 한국사회의 문제점이었던화합 못하는 한국인’, 우리사회는 화합이 가장 부족하다고 지적했던것이 현재까지도 우리사회의 가장 문제로 남아있다. 동양의 평화는 고사하고 남북한간에도 화합못하고 있는 것이 실정이다. 


13. 맺으며


동양의 평화를 위해 총을 겨눈 안중근, 결코 죽음앞에서 두려워하지 않았던 안중근, 그의 무모하지만 영웅적인 정신은 우리의 무감각한 잠자는 생각을 깨워준다. 많은 독립군들중의 사람이 아닌, 안중근만의 특별한, 그를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있다.  바로 그의 사상적 가치관이다. 단지 한명의 숙적 이토를 처단하고 그의 죄를 고발하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가졌던 그의 평화사상이 그를 영웅으로 만드는 것이다. 영웅을 추구하는 현재우리 사회의 모습에서 과연 진정한 영웅상은 어떤것인가. 일찌기 안중근이 지적했던 우리 한국사회의 서로 화합하지 못하는 문제점을 아직도 안고있는 우리사회에서, 안중근에게서 배워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나라는 사회의 화합이 가장 부족하다. 사람들이 겸손의 덕이 부족하고 허세와 교만으로 일을 하니, 남의 위에 오르는 것은 좋아하고 남의 아래에 있지는 않으려고 하는 까닭이다라고 지적한다.


이것이 어찌 한국인만 그렇겠냐마는, 현재도 명백한 우리사회의 불협화음의 원인임이 확실하다. 역사의 영웅, 위인을 어떻게 배우고 세우느냐에 따라 나라의 위상도 세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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