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마여행기

버마여행기

지난 2주간 태국과 미얀마(버마)를 방문했다. 특히 미얀마와 태국의 국경 난민캠프에 머물고 있는 메솟 멜라캠프도 다녀왔다. 멜라캠프는 미얀마를 떠나야 했던 카렌족들이 머물고 있다. 카렌족은 지난 60여년을 버마 정부와 독입투쟁을 해오다 몇년전에야 평화협정을 맺었다. 

2차대전 당시 버마는 영국의 식민지였는데 일본이 침략해 들어오자 카렌족은 영국군에게 버마에서 카렌족의 독립을 보장받고 영국군과 함께 일본에 대항해서 싸웠다. 반면 아웅산 장군을 비롯한 버마는 일본군과 함께 영국에 대항에 싸우게 된다. 그러나 일본이 패망하자 영국은 버마의 독립만 인정하고 카렌족과 약속한 독립을 저버리게 된다. 이때부터 카렌족과 버마의 내전은 60여년간 지속되었다. 

1947년 아웅산 장군을 비롯한 독립가 9인이 반군세력에 암살당하면서 독립과 연방은 물거품이 되고 군사정권인 네윈이 집권하면서 사회주의 길을 걷게 된다. 허나 온갖 폭력과 탄압으로 버마는 아시아 최빈국으로 전락하게 되고 급기야 1988.8.8일 '양곤혁명' 또는 '8888혁명'이 터지게 된다. 네윈은 이들을 탄압하면서 수천이 죽고 많은 이들이 정치범으로 감옥가고 남은 이들은 국경지역으로 흩어져 24년간 무장투쟁을 지금까지 해오고 있다. 이들이 바로 버마학생민주전선이다. 

이후 1990 자유 총선이 허락되면서 아웅산 수치여사를 당수로한 NLD(민족민주동맹)가 80%이상의 의석을 차지하면서 대승을 거둿으나 군정은 오히려 탄압하고 수치여사를 가택연금시키게 된다. 

1991년 수치여사는 가택연금 상태에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게 되지만 가택연금으로 받을수 없어 대신 아들이 받게 된다. 이후 2010년 가택연금에사 풀려난 뒤 수상소감을 하게 된다. 

2008년 군부는 헌법개정하고 자유선거로 총선을 실시했으나 수치여사를 비롯한 NLD는 불참을 하게 된다. 그러나 2011년 총선에서 NLD는 전체지역 45석중 43석을 차지하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집권여당은 군부의 산하에 있는 당이며 NLD는 제1야당으로 역할하고 있다. 전체 의석중 25%가 군부에 자동배정되기 때문이다. 

‘미얀마’는 현재 공식명칭인데 이는 네윈의 군부가 8888혁명 이후 전제 소수민족도 포함하는 정책을 표방하면서 국명을 버마에서 미얀마로 바꾸었다. 그러나 아웅산 수치 여사는 군부의 일방적인 것으로 버마를 선호하고 있다. 

버마를 돌아보는 동안 많은 사람도 만났다. 8888혁명에서 데모를 했다는 이유로 정치범감옥에 6년, 19년을 같혀있다가 출소하여 직업을 구하기 어려워 같은 환경에 처한 사람들 여럿이 모여 서로 상부상조 하는 택시조합에서 택시운전을 하며 살아가고있는 사람도 있다. NLD 대변인과 의장님을 만나서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수치여사는 결국 약속을 잡지못해 담장너머로 얼굴만 봐야했다. 버마를 떠나야 했던 카렌족 난민들과 난민지위마저도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 태국 쓰레기마을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버마의 다양한 모습을 보았다.

한가지 인상깊은 것은 카렌족 난민이건 쓰레기마을에 사는 사람이건, 일반인이건 거의 대부분은 아웅산 장군과 수치여사를 존경하며 국모라고 여기고 있다. 카렌난민들은 수치여사가 리더가 되면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녀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기 때문이다. 

반면 수치여사에 대한 아쉬움도 있다. 특히 국경지역에서 24여년간 무장투쟁을 하고 있는 8888혁명 출신 버마학생민주전선이다. 이들은 수치여사를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그러나 또 견제하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이들내에서는 수치 여사를 ‘가장 어려운 동지이자 가장 어려운 적’이라는 말까지 있다고 한다. 이들은 수치여사를 버마 민주화의 상징이자 미래이며 자신들을 이끌어줄 것이라 생각하고 전폭적으로 지지한다. 그러나 수치여사가 스스로 2008년의 군부의 헌법개정과 선거를 반대 했으면서 2011년 선거에서 자신이 반대했던 군부의 제도권에 스스로 들어가 정치인이 된 것에 대해 큰 아쉬움을 가지고 있다. 자신이 반대했던 제도권에 스스로 들어가 군부의 독재와 탄압하던 자들에게 면죄부를 주엇다는 것이다. 이렇게 큰 아쉬움을 표한하면서도 수치여사를 전폭적으로 지지할 수 밖에 없는 것은 현재 아웅산 수치여사외에 지도자가 없다는 것이다. 

8888혁명이후 감옥에수 19여년을 살고 나왔던 사람도 수치여사를 지지하고 리더가 되어주기를 바라지만 또 한편으로 아쉬움을 나타내고 있다. 그녀의 상징성과 현실정치와의 괴리가 크기때문이다. 또 다른 비판은 수치여사를 수행하는 인력구조의 문제점이다. 수치여사에 대한 내부의 보조가 막혀있는 부분도 있다는 지적이다. 그리고 수치여사 주변의 동지들 대부분이 NLD출신, 즉 대부분 감옥에서 많은 시간들을 보냈던 사람들인데 이들이 실질 정치에 대한 경험이 부족하고 행정수행 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는 수치여사 스스로 그 상징성과 현실 정치의 벽을 넘어서야 하는 부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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