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긴급사태

"훔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을때 개인의 긴급사태라고 볼 수 있다"




평소 고전을 안읽었던, 사실 고전은 핑계고, 책을 읽기보단 책장에 책종류들을 늘려가는게 취미였던 나로서는 24601의 스토리를 뮤지컬영화 레미제라블을 보고나서야 제대로 알게되었다. 그리고 그 영화를 다시보고 또 봤다. 뮤지컬기법의 장발장 영화가 너무 재밌고 멋있어 1999년 리암니슨 주연의 영화 레미제라블도 다시 찾아봤다. 둘 합쳐서 아마 5~6번은 본거 같다. (덕분에 오페라의 유령도 이때 찾아봤다)


장발장은 인간의 가장 기본 욕구인 생존을 위한 본능적 욕구를 행하다 19년 옥살이를 했다. 사실 자기보단 누이동생(?)을 위해 훔치긴 했지만 말이다. 영화에선 이에 대한 묘사를 한줄로 대사로만 설명했지만 난 지금 이 글의 포인트를 여기에 둔다. 장발장이 옥살이 후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는 스토리가 아닌 빵을 훔치게 되기까지의 과정말이다.


장발장은 빵 한조각에 대한 값을 19년 동안 지불했다. 이는 장발장이 처한 곤경한 상황에 대한 고려보단 타인의 소유물을 침해했다는 사실에 대한 기준을 오로지 법적기준으로만 따졌기때문일 것이다. (물론 당시 법적처벌 기준과 형량에 대한 사실관계여부는 중요치않다. 작가가 좀 더 드라마틱한 설정을 위해 과한 징벌을 설정했을수도 있을테니 말이다)


이 기사(http://goo.gl/5gvtjo)에 나오는 판결인, 긴급사태에 처했으므로 생존권이 소유권에 우선한다는 판결은 장발장이 가장 듣고싶었던 판결일게다. 이 판결은 타인의 소유물을 훔쳐야만 하는 상황에 처한 개인에 대한 이해를 기본으로 한 것이다. 물론 이를 생계형 도둑들에 대해 일괄적용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닌 상징적인 판결로 보는게 맞을 것이다.


이 기사를 보며 나의 지나간 시간들이 생각났다. 소유권이 생존권보다 우선할 수 없다는 판결은 지금당장 입에 빵부스러기를 넣지 않으면 쓰러져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을 개인의 "긴급사태"로 본것인데 매우 휴머니즘적인 판결이라고 생각한다.


내 경험상 소수의 인간을 제외하고 대개 배고픈 인간은 자기 눈앞에 풍성한 먹거리가 보여도 그게 타인의 소유물이라면 굶주려도 선뜻 훔치게 되질 않는다. "저걸 훔치면 머릴 두둘겨 맞을거야"라는 생각이 앞서기 때문이다. 이때는 생존본능이 약하고 아직까지는 사회적 약속을 상위에 두기때문이다. 그런면에서 빌어먹는것이 훔쳐먹는 것보다 선택하기가 쉽다.


그러다 여러날 굶주리면 눈앞에 물체가 두개로 보여지기 시작하고 다리를 헛짚게 되는데 이때는 빵부스러기를 자기입에 넣어야겠다는 생각이 훔치면 머리를 두둘겨 맞을거라는 생각보다 앞서게 된다. 이때 굶주린 손은 빵부스러기를 낚아채서 입에 넣으며 뛰게되는데 후둘거려 비틀비틀대는 다리는 곧 풀려버린다. 비틀거리는 다리와 허기져 배가죽에 달라붙은 내장과 등뼈에 전해지는 고통으로 뛰지만 걷는이보다 느릴게다.


빵부스러기 한입을 그렇게 몇대 두들겨맞는 것과 바꾼다. 이때는 맞아도 아픔을 못느낀다. 굶주림이 주는 육체적 아픔이 맞는 아픔보다 아마 더 클게다. 그렇게 피흘려 쓰러지면 죽는 것이고 다행히 일어날 힘이 남아 일어서면 그 여정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이게 굶주린 자가 처한 "긴급사태" 마지막 단계다.


윗동네 나라는 90년 후반부터 긴급사태의 연속이었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많은 이들이 처한 상황은 장발장과 다를바 없었다. 그렇게 긴급사태 속에서 누군가는 그걸 이겨내 생존하고 누군가는 길바닥에서 그렇게 시라져갔다.


빌어먹는건 수치스럽지만 안전했고 훔쳐먹는건 용감했지만 무서웠다. 빌어먹는건 동정을 받았지만 훔쳐먹는건 비난을 받았다. 그렇게 긴급사태 속에서 나를 내던지며 어쩔수 없이 또 다른 나를 만들어내며 한계를 극복해간다.


사회계약의 싸이클이 무너지면 그렇게 개인의 생존계약의 싸이클도 무너져버린다. 그러면 한 인간은 사라지고 생존욕구만 남은 뼈에 가죽이 씌여진 한낯 동물만 남게된다.

한 개인이 생존에 취약한 긴급사태에 처하게 될 경우 보통 사회의 책임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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