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진적 좌파란



'진보와 보수의 12가지 이념'

-급진적 좌파-





급진적 좌파 해부하기

* 급진적 좌파: 좀 더 평등주의적, 공동체적인 사회를 모색한다.


1. 급진적 좌파 내의 다양한 목소리들


1) 민주사회주의

민주사회주의 이념은 자본주의에 대한 직접적인 반응으로 시작되었다. 1884년 영국에서 시드니 웹(Sidney Webb, 1859~1947)과 그의 부인 비어트리스 웹(Beatrice Webb, 1858~1943), 그리고 유명한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1856~1950)와 같은 지식인들이 페이비언 협회(Fabian Society)를 결성했다. 페이비언들은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비판에 공감했지만, 비폭력적이고 대중 합의적인 과정을 통해 자본주의 체제를 점진적으로 극복하고 사회주의 체제로 나아가야 한다고 믿었다. 


이런 민주사회주의는 20세기 각국의 급진적 좌파 진영 내에서 가장 특출한 관점이었다. 애초 수정마르크스주의로 출발해서 오늘날의 특출한 지위에 오르게 되었지만, 다원적 사회를 더욱 왼쪽으로 이동시킬 정책을 주창하고 추구해 왔다. 민주사회주의는 현대 자유주의보다 더 급진적으로 자본주의를 비판하지만, 자본주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혁명이 필요하다는 정통 마르크스주의 사상은 거부한다. 그 대신 민주사회주의는 사회주의 정당을 창설하여 민주적 선거를 통해 집권해서 정상적인 정치권력을 통해 마르크스주의적 목표(예컨대, 생산수단의 공적 통제를 강화하고, 사회적 재화를 더욱 평등하게 분배하며, 민주주의를 더 깊이 발전시키는 것) 를 달성하려고 한다. 


(당시 사회주의에 대한 지지가 늘어나면서 페이비언들은 민주사회주의자들이 의회에 질출해서 사회주의식 개혁을 도모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1901년 페이비언들은 영국노동운동 지도자들과 연대해서 노동당을 창당한뒤, 제2차 세계대전 후 집권해 하원을 장악하고 전력, 철강, 석탄 산업의 국유화 같은 사회주의 정책을 관철했고 국립 의료 제도(NHS, National Health Service)를 통해 의료도 사회화했다. 1895년경 독일 사회민주당내에서 정통 마르크스주의자와 페이비언 운동의 영향을 받은 수정주의자간의 분열이 일어나면서, 수정주의의 거두였던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은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마르크스의 사회 변화 이론을 지나치게 결정론적인 것으로 오독했다고 주장했다. 베른슈타인은, 상황이 무르익으면 자본주의가 저절로 붕괴하리라던 정통 마르크스주의 교의에 따르면, 사회민주당은 형명의 때가 오기를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인식하고 1899년 '사회주의를 위한 전제와 사회민주주의의 임무' 일명 '진화사회주의'를 집필하며, 자본주의가 조만간 붕괴하지 않을 것이며, 노동계급의 혁명성이 점차 옅어지고 있고, 민주주의의 진전으로 사회민주당이 정치권력을 사회주의로 가는 개혁을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토니 블레어, 고든 브라운, 베른슈타인, 슈뢰더, 빌리 브란트 등의 인물들의 민주사회주의적 정당들이 유럽에서 여러차례 집권했다. 특히 스웨덴은 사회민주주의의 최고 성공 사례라고 할 수 있다. )


민주사회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순수한 자본주의 체제가 여러가지 시장 실패의 결함을 갖는다고 믿는다. 사회주의자들은 시장 실패에만 초점을 맞추는 현대 자유주의의 자본주의 비판은 피상적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가 인간 생활의 모든 측면을 지배하고 있음을 현대 자유주의가 깨닫지 못한다고 본다. 즉, 자본주의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지나치게 물질적, 이기적으로 사회화되고, 대중이 믿는 것 보다 실제로는 훨씬 덜 민주적인 정부가 구성되며, 사회적 분열과 서열 구조의 기초가 싹튼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는 사유재산을 철폐하기 보다 재산을 소유한 사람에게 발생하는 이익을 제한하려고 한다. 사회주의자는 절대적인 경제 평등을 추구하기 보다 부의 집중에 따르는 과도한 허영과 사치 및 권력을 제한하려 한다. 


자본주의를 당장 철폐하지 않으면서도 자본주의의 문제를 경감하기 위해서 사회주의자들은 사회 전체의 문화적 가치를 바꾸려고 노력한다. 민주사회주의자들은 정통 마르크스주의와는 달리 민주 자본주의가 지지하는 기본 가치들을 사회주의적 방식으로 재구성할 수 있으며, 그렇게 재구성된 새로운 가치를 그 사회주의적 방식으로 재구성할 수 있으며, 그렇게 재구성된 새로운 가치를 그 사회의 문화 속에 포함할 수 있다고 본다. 사회주의자들은 적어도 전체 정치 공동체가 자본주의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워질 때에만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본다. 


2) 평등주의적 자유주의

다원적 사회에서 좌파 사상을 끌어안는 현실 정당들의 지배적 이념이 사회주의였다면, 세계 학계에서 이 사상의 지배적 정치철학은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였다. 존 롤스를 필두로 주로 발전된 평등주의적 자유주의는 다원주의 사회에서 현대 자유주의가 통상적으로 주장하는 수준보다 더 평등한 수준으로 사회적 재화를 분배하자고 제안한다. 


평등주의적 자유주의는 다원주의 사회 내에서 부, 소득, 교육 및 기타 성공 요인들이 자연적 차이-예를 들어, 지능과 체력의 유전적 차이-와 사회적 상황 –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속해 있는 가족과 공동체의 자원 차이가 그 사람의 장래에 도움이 되거나 걸림돌로 작용하는 현실-에 의해 큰 영향을 받는다고 지적한다. 


평등주의적 자유주의는 날 때부터 재능을 적게 가진 사람들에게 공평한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사회정의라고 믿으며, 그렇게 하려면 정치 공동체 차원에서 자연적, 사회적 불이익을 타고난 사람들을 북돋아 줄 조치를 폭넓게 취해야 한다고 본다.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자들은 불평등은 가장 취약한 계층에게 상대적으로 유리하게 작용할 때에만 정당화될 수 있다고 믿는다. 



3) 세계주의 Cosmopolitanism

세계주의는 급진적 좌파 내에서도 사회적 재화의 불평등이 한 국가 내에서보다 국가들 사이의 불평등이 더 심하다고 문제시한다. 이들은 전 지구적 빈곤과 불평등 현실을 지적하면서, 본질적으로 롤스의 평등주의적 자유주의 원칙이 일국 내 사회적 재화의 분포에만 적용되어서는 안 되고, 전 세계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세계주의 이론가들은, 어느 나라에서 태어났느냐 하는 우연적 요소가 어떤 사람에게는 유리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불리한 기회를 부여한다고 주장한다. 세계주의 이론가들은 빈국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불리한 조건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을 개선해야만 정의가 실현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전 지구적 정의에 대해 온건한 접근과 급진적 접근이 있는데, 온건한 접근을 자선활동에 비유한다면 급진적 접근은 국가의지도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즉 개인이 자발적으로 자선 활동을 벌이는 것을 넘어, 잘사는 나라들이 가난한 나라들을 도울 정치적 책임이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국가들 사이의 경제 불평등을 규제할 목적의 분배적 원칙을 설정할 일종의 국제적 정치제도를 주장하기도 한다. 세계주의적 정의를 제창하는 이론가들은 진정한 정의를 구현하려면 전 지구적 차원의 분배가 필요하고, 다원적 국가들이 그런 의무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4) 시민적 공동체주의 civic communitarianism

시민적 공동체주의는 현대 자유주의자들 그리고 롤스와 같은 평등주의적 자유주의들이 지나치게 개인주의에 기반하고 있어서 ‘공동선’에 대해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이들에 따르면 평등주의적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율성(개인이 자신의 인생 계획을 선택하고 추구할 수 있는 역량) 을 보호하는 이론에만 치중한 나머지 개인들이 선택을 내릴 때 사회적 맥락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는 점을 간과했다고 한다. 하버드대 마이클 샌델을 비롯한 시민적 공동체주의자들은 정부가 시민권에 대한 강력한 공감대를 발전시킬 정책을 추구해야 한다고 믿는다. 


시민적 공동체주의자는 시민들이 더욱 공동체적인 지향을 가질 수 있는 가장 좋은 조건이 “우리가 거주하고 있는 특정한 지역공동체에서 함양된, 재활성화된 시민적 생활”내에서 만들어질 수 있다고 본다. 요컨대 이들은 시민사회의 급진적 재구성을 촉구한다. 즉 ‘자발적 결사체들’voluntary associations 을 부활시키자는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자발적 결사체들은 덕성을 지닌 시민들을 양성하는 데 필요한 기반이 될 수 있으며, 복지국가 운영을 위해 필요한 시민들 간의 강한 유대감을 가졌으며, 현재 다원적 정치체에서 나타나는 것보다 더 확실한 형태의 민주주의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시민적 공동체주의자는 공동선을 위한 시민들의 열성적 참여를 포함한 사회주의적 가치를 더욱 추구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들은 가치의 다양성과 다원주의를 받아들인다.


5) 급진적 페미니즘 radical feminism

급진적 페미니즘은 우리의 거대한 정치적 대화에 반드시 포함해야 할 사상을 가진 또 하나의 유사 이념이다. 자유주의 페미니즘이 다원적 사회의 기존 제도 내에서 기회균등을 달성하는 것에 만족한 반면, 캐서린 매키넌과 같은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은 진정한 양성평등이 이루어지려면, 남성이 자신들의 이해간계에 유리하게끔 구축한 다원적 제도를 그대로 둔 채 여성들이 성공할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하겠다고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들은 진정한 양성평등을 위해 기본적인 사회 정치제도들을 심층적으로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 가운데 가장 기초적인 제도인 가족인데,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이 교육과 고용 등에서 여성의 기회균등을 확보하는데 성공한 후에도 가부장적 가족 내에서 여성은 여전히 남성에게 종속적인 존재로 남아있다. 급전적 페미니스트들은 ‘사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구호를 내걸고, 가족 구조를 변혁해 자유주의의 차별금지 정책에서보다 더 평등한 결과를 내려고 노력한다.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은 남성의 지배가 가족 내에만 한정되지 않고 다원적 사회 전체에 확대되어 사회적 역할을 규정하는 방식에까지 적용되어 있다고 이해한다. 매키넌은 남성의 지배를 줄이려면 여성이 ‘힘을 지님’으로써 여성 스스로 여성적 가치와 지향을 반영하는 사회적 역할을 창조하고 규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들은 공사 영역에 구분한 정치보다 더 넓은 의미에서 정치를 모색하며 여성이 다원적 사회 내의 모든 제도에서 남성과 동등한 힘을 가져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6) 급진 민주주의 이론 radical democratic theory

급진 민주주의 이론은 현재 다원적 사회에서 통용되는 민주제도와 정치과정의 적합성을 비판한다. 급진 민주주의자들은, 시민들이 선거에서 자유주의 후보와 보수주의 후보 사이에서만 국민의 대표를 뽑아야 할 때, 다양한 이익집단들이 자신의 이익을 정치적 의사 결정의 결과에 적어도 어느 정도 반영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할 때, 그리고 정부가 다수자의 의지에 대해서만 반응을 보일 때 민주주의가 성립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급진 민주주자들은 민주주의란 끝없는 수평선처럼 최종적으로 달성할 수 없는 것이지만, 더 자유롭고 평등한 정치 공동체를 향한 움직이는 과녁으로 여긴다. 이런 측면에서 급진 민주주의는 주변인들, 배제된 사람들, 억압받는 사람들을 해방하기 위한 일련의 끊임없는 사회운동이기도 하다. 


다원적 사회의 정부가 흑인, 여성, 동성애자에 대한 평등한 처우를 보장한다 하더라도, 타인에게 종속된 사람들이 스스로 힘을 기르려면 새로운 ‘쟁의적 정치행동’contentious political actions 이 있어야만 민주주의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급진 민주주의자들은 ‘투표 중심’vote-centric 의 민주주의 개념을 ‘대화 중심’talk-centric의 민주주의 개념으로 대체하자고 주장한다. 소수파가 자신들의 정당한 관심 사안과 이해관계를 보장받으려면 단순 가부투표를 넘어 타인들을 설득할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급진 민주주의자들은 인간 사회의 모든 공동체에서 시민의 활발한 참여를 권장할 수 있는 ‘강한’민주정 과정을 요구한다. 


7) 급진 녹색주의 radical green

급진 녹색주의는 주로 환경을 보호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했지만 역시 자본주의의 통제를 원한다. 자본가들을 외부 통제 없이 그냥 내버려 둘 경우 그들은 환경을 훼손하는 새로운 경제 발전을 추구할 가능성이 크다. 자유주의 환경론자들은 정부에 대해 기업 활동과 경제성장에서 비롯되는 환경문제를 관리하라고 설득해 왔지만, 이들은 환경문제와 경제성장 간의 균형을 맞출 필요가 있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자유주의 환경론자들은 정부에 규제나 요구를 통한 온건한 조치를 취하지만, 급진 녹색주의자들은 훨씬 더 공격적이다. 예를 들어 독일의 녹색당은 핵발전소 건립을 중단시킬 정책을 추구해 왔고, 브라질의 급진 녹색주의자들은 열대우림의 벌목을 중단시키려고 노력했다. 


요컨대, 급진 녹색주의자들은 경제 효율성이나 경제 발전, 에너지 자립, 그리고 기타 다원적 정치 내에서 서로 경쟁하는 경제 목표들보다 환경보호가 더 중요한 우선순위를 차지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들은 지속 가능한 환경은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급진 녹색주의자들은 환경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경제 발전을 중단시키기 위해서 다원적 정치를 통한 방법 – 공익 소송을 제기하는 것부터 특정 경제 발전 계획을 반대하거나 녹색당을 결성해서 급진 녹색주의자를 공직에 진출시키는 것 등 – 을 동원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판단한다. 



2. 철학적 가정 1: 존재론


-사회주의적 이상으로 물질의 힘을 조절한다-

민주사회주의의 존재론적 관점을 신칸트주의Neo-Kantianism 로 규정하는 분석가들이 있는데, 급진적 좌파 내의 여타 관점들에 대해서도 같은 분석을 할 수 있다. 신칸트주의는 헤겔의 관념론과 마르크스의 유물론을 종합하려고 한다. 베른슈타인과 같은 초기의 민주사회주의자들은 마르크스의 경제결정론을 완전히 거부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더 깊은 차원의 가치에 종속시키고자 했기 때문에 신칸트주의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신칸트주의를 받아들이면 (사회주의적 원칙과 같은) 특정한 도덕성을, 물질적으로 필요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바람직하다는 이유만으로, 자유롭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민주사회주의자들은 이런 존재론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정치권력을 민주적으로 활용하여 사회주의적 가치를 추구한다면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계를 바꿀 수 있다고 믿을 수 있었다. 그러나 베른슈타인은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존재론이 지나치게 유물론적이고 결정론에 기대고 있다고 보았다. 하버트 스펜서와 같은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은 역사 발전이 자연법칙에 의해 결정되므로 인간의 진보가 적자생존에 달려있다고 했지만, 사회주의자들은 인간이 이런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토머스 헨리 헉슬리는 “사회의 진보란 자연선택 이론에 따라 삼라만상이 진화하는 모든 단계에 인간이 개입해서 그것을 다른 어떤 것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이를 윤리적 과정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인간은 자기중심성, 경쟁, 지배 등이 통용되는 자연세계에 굴복하기보다, 자신의 도덕적 의지를 이용해서 자기 절제를 행하고 타인을 도우며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민주사회주의뿐만 아니라 여타 급진적 좌파 사상 역시 신칸트주의적 존재론을 수용한다고 봐도 무방하다.롤스와 같은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자들은 칸트의 이론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강조한다. 칸트의 이론은, 어째서 평등주의 원리가 ‘우리가 심사숙고한 끝에 내리는 도덕적 판단’과 합치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규범적인 논거를 제공해 준다. 그리고 이상적인 정의론을 개발하려는 평등주의자의 모든 노력 속에 은연중 전제되어 있는 것은 ‘도덕적 이상이 인류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가정이다. 


시민적 공동체주의자, 급진적 페미니스트, 녹색주의자 등도 공동체적 가치와 젠더 평등적 가치 그리고 환경 가치가 물질적, 경제적 힘에 의해 오랫동안 예속되어 왔음을 인정하지만, 자신들의 이론을 통해 도덕적 이상이 인류의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증명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므로 급진적 좌파는 마르크스의 유물론 및 고전적 자유주의의 자연론 모두와 거리를 둠으로써 특정한 존재론에 근거한 정치적 원리를 주장하지 않는다. 급진적 좌파는 긍극적 실재를 알고 있다고 내세우지 않으며, 인간의 역사가 예정되어 있다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급진적 좌파가 일정한 존재론적 가정을 받아들인다고 말할 수 있다. 급진적 좌파의 지지자들은 ‘가치’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해 사회적 삶에 영향을 미치며, 그런 가치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경제력과 자연법칙을 비롯해 우리의 선택에 영향을 주는 여러가지 속박들로부터 독립되어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 이들은 인간의 삶이 경제력이나 여타 물질적 힘의 영향을 앞으로도 계속 받겠지만, 그럼에도 인간이 인류의 진화와 역사 발전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믿는다. 결국 선택은 인간이 내린다.



3. 철학적 가정 2: 인간론


-인류의 공통성과 개인 간의 차이를 강조한다-

급진적 좌파는 현대 자유주의에서 강조하는 도덕적 명령에 대해 전혀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급진적 좌파 내의 여러 목소리들은 자유주의 제도들이 자유주의가 추구하는 인간의 발전을 오히려 가로막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급진적 좌파는 현대 자유주의가 인간과 인간 발전의 개인주의적 측면만 지나치게 강조했다고 믿으며, 인간의 사회적 측면도 더 많이 인정하고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급진적 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는 개인이, 서로 다른 개인적 특성과 서로 다르게 사회적으로 구성된 목표, 관점, 인정 등에 기반을 둔, 특유의 정체성을 지닌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급진적 좌파는 자본주의 경제권과 대의 민주주의 제도 아래 강력한 행위자들이 우리의 선호와 선택을 심대하게 좌우하기 때문에 개인의 자율성이라는 것은 단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또 이들은 좀 더 평등하고 협동적이며 세계주의적인 사회에서 인간의 정체성과 역량을 좀 더 잘 키울 수 있다고 믿는다. 


시민적 공동체주의는 고전적 사회주의 사상으로부터 영감을 취하여, 인간이 전체적으로 사회에 속한 공동체적인 존재라는 점을 자유주의가 어떻게 오해했는지를 보여준다. 마이클 샌들에 따르면 인간이 추구하는 목표는 언제나 인간이 처한 사회적 맥락에 의해 깊은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급진적 좌파 내의 여러 목소리들은 인간존재의 공동체적 기반을 각기 다르게 강조한다. 시민적 공동체주의자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지역공동체와 시민사회 내의 결사체들을 강조한다. 세계주의 이론가들은 우리가 전 지구적 공동체의 구성원들이며, 따라서 세계 공동체에서 우리의 책임 – 세계 도처에 빈곤층과 억압받는 집단들에 대한 의무 – 을 인식할 수 있는 제도적 수단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지적한다. 녹색주의는 우리가 전 지구적 생태계의 한 부분이라는 점을 중시한다. 이런 관점은 인간이 아닌 생물종과 지구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더 잘 자각하도록 가르칠 수 있다. 


인간존재가 공동체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다고 보는 급진적 좌파의 가정은 자유주의보다 훨씬 넓은 의미의 정치적 덕성 개념을 끌어낸다. 급진적 좌파는 인간이 집합적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을 발전시킬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 인간은 ‘도구적 이성’뿐만 아니라 ‘정치적 이성’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자들은 공동체의 의사 결정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공적 합당성을 발휘할 수 있다고 강조해 왔다. 시민적 공동체주의자들은 인간이 타인의 관심 사안에 대해 공감하면서 그것을 들어줄 수 있는 능력, 그리고 사람들에 의해 가능한 한 폭넓게 받아들여질 만한 결과를 모색할 능력을 기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급진적 좌파는 모든 인간이 민주 시민의 덕성을 개발하려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편이다. 전체적으로, 급진적 좌파의 여러 목소리들은 사회주의의 도덕성과 가치를 지지한다. 



4. 철학적 가정 3: 사회론


-더욱 공동체적이고 평등한 사회를 모색한다-

급진적 좌파는 전 지구적 사회와 국가 사회에서 지역공동체, 학교, 교회, 노동조합, 직장 및 여타 결사체에 이르는 수많은 종류의 사회를 인정한다. 다양한 사회 내에서 그리고 그 사회들 사이에서, 더욱 강조하고 분석할 필요가 있는 두 가지 유형의 중요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첫째, 사회마다 그 구성원들이 서로 간에 유대를 맺고 공동의 삶을 모색하는 정도가 다르다. 둘째, 권력과 특권이 공동체 내 개인들 사이에 어떻게 분포되어 있는지도 사회마다 다르다. 사회에 대해 급진적 좌파가 내리는 가정과 현대 자유주의가 내리는 가정이 서로 차이가 나는 이유는, 두 입장이 권력과 특권의 분포 현황을 규범적으로 서로 다르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vs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전자는 어떤 사회에서 인간의 공통성을 줄이려는 속성이고, 후자는 공통성을 강조하는 사회라고 볼 수 있다. 후자의 경우 사회에서 구성원들은 자신의 집합적 모교를 규정하기 위해 함께 모인다. 그 사회 속의 모든 사람이 필요로 하는 재화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런 재화에 대해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접근권을 보장해 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함께 결정한다.  구성원들의 공통된 삶을 강조하는 사회가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인 사회보다 훨씬 더 매력적이라는 생각을 가장 열성적으로 지지하는 사람은 아마 시민적 공동체주의자일 것이다. 그럼에도 급진적 좌파에 속한 사람들은 존중 받고 보호되어야 할 중요한 개인적 삶의 영역이 존재한다는 점에도 동의한다. 


각 사회가 권력, 특권 및 기타 사회적 재화의 비교적 평등한 분포를 갈망할 수도 있지만, 급진적 좌파는 완전히 계급이 없어진 사회가 존재하기 어렵다는 점을 인정한다. 어느 사회이든지 각종 불평등이 존재하지만, 급진적 좌파는 그런 불평등이 최소화된 사회, 그리고 불평등이 존재하더라도 모든 사람이 평등한 사회 구성원이고 인간으로서 평등한 존중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인식이 무시되지 않는 사회를 희구한다. 세계주의적 이론가들은 전 세계의 모든 일류가 지닌 공통성을 강조하는 윤리를 설파한다. 그리고 이들은 선진국의 저개발국 지배를 줄일 방법도 모색한다.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자는 재능이 많은 사람과 적은 사람 간의 공통성을 강조하는 윤리를 설파하며,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마음대로 지배하지 못하게 할 방도를 찾는다. 급진적 페미니스트는 남성과 여성의 공통성을 역설하며 남성의 여성 지배를 줄일 방안을 찾는다. 급진적 민주주의자는 사회 내에 존재하는 모든 지배 유형을 찾아내려 하고 민주주의를 (사람과 사람을 갈라놓는 모든 종류의 불평등을 찾아내고 그것을 줄이려는) 지속적 과정의 하나로 파악한다.



5. 철학적 가정 4: 인식론


-정치적 이성을 강조한다-

급진적 좌파는 과학의 논리로 제공되는 지식만으로는 ‘좋은 삶’을 추구하기에 적당치 않으므로 그런 논리가 정치에 의해 보완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과학 지식은 두 가지 한계가 있다. 첫째, 과학의 논리는 ‘제한적 이성’bounded rationality 만을 창출할 수 있을 뿐이다. 급진적 좌파는 과학의 이런 특징을 받아들이면서 과학적 결과를 그 자체만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되고, 정치적 지식을 획득하려는 포괄적인 접근 속에 과학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둘째, 차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특정한 정책을 취했을 때 결과가 긍정적, 부정적 측면을 모두 지닌다면, 과학의 논리만으로는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 판단을 내릴 방도가 없다. 이런 과학의 한계에 대한 해독제가 바로 정치다. 급진적 좌파는 ‘권력 정치’power politics 와 다른, 더 나은 형태의 의사 결정 방식, 즉 현대 자유주의의 실용주의적 인식론을 더욱 첨예하게 발전시킨 의사 결정 방식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이것을 ‘정치적 이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 


정치적 이성은 실용주의와 마찬가지로 달성하고자 하는 궁극적 목표에 관한 궁극적 지식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구체적인 사회, 경제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또한 사회문제를 줄이고 사회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사회적 실험을 실시하는 것에 찬성한다. 실험적 개혁을 디자인하고 평가할 때 나타나는 편향을 상쇄하기 위해 급진적 좌파는 자본주의에서 충족되기 어려운 가치들 – 예를 들어, 평등, 연대, 지속 가능한 환경, 좋은 사회를 추구할 수 있는 민주적 과정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줄 아는 능력을 지닌 시민됨 등 – 을 평가항목에 포함하고자 한다. 마이클 샌들은 정책을 입안하고 평가하는 핵심적 가치로서 훌륭한 시민성의 덕목을 포함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해 왔다. 


급진적 좌파에게 문제의 핵심은 좌파적 가치에 대한 인식론적 토대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결정을 내릴 때 좌파적 가치를 어떻게 하면 더 잘 포함할지에 있다. 급진적 좌파는 공동체에서 의사 결정을 할 때, 더 많은 정치적 이성을 달성하기 위해 의제 설정 – 공동체의 문제를 확인하고, 공동체를 키울 수 있는 의제 설정 – 과정이 사회 모든 계층의 시민들에게 대폭 개방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정치적 이성을 달성하기 위한 시민적 역량으로는 빌헬름 딜타이Wlhelm Dilthey, 1833~1911 가 ‘이해’라고 부른 것이다. 또 다른 시민적 역량은 ‘공적 이성’을 발휘하는 것이다. 즉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과 이해관계를 분명하고 조리 있게 표현함으로써 타인이 그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좌파는 정치적 이성이 불완전하다고 해서 평등과 연대와 지속 가능한 환경 및 여타 목표들을 달성하려는 노력을 포기할 수 없다고 주장할 수 있다. 둘째, 급진적 좌파는 정치적 이성의 과정과 결과 모두가 잘못될 수도 있다고 인정하지만, 정치적 이성의 잠정적 특징 덕분에 비록 지금은 잘못된 결과가 나왔더라도 미래에는 진보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반박할 것이다. 급진적 좌파는 사람들과 늘 협력해서 정치적 이성의 이상과 실제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격차를 찾아내고 그것을 메우기 위해 노력한다.



6. 정치적 원리 1: 정치공동체


-수많은 정치체 내 다양한 인민들 간의 연대-

급진적 좌파는 급진적 우파보다 훨씬 더 국제주의적이다. 급진적 좌파 내에는 국제적 정치 공동체에 초점을 맞추는 정체성을 채택하자고 촉구하는 여러 목소리들이 있다. 민주사회주의자는 사회주의적 목표를 달성하는 궁극적인 무대가 전 지구적 공동체라는 사실을 오랫동안 인식해왔다. 세계주의적 정의의 주창자들은 산업화된 서구 국가들과 개도국 사이에 존재하거나, 풍족한 북반부와 남반부 사이에 존재하는 엄청난 부의 불평등을 줄이려고 노력한다. 급진적 좌파 내의 많은 목소리들은 국제기구들, 특히 세계무역기구와 국제통화기금이 현재 취하고 있는 정책을 반대한다. 급진적 좌파는 이런 기구들의 입장이, 지구화로 발생한 혜택을 개도국들에게 더 많이 분배하는 정책이 아니라, 가장 발전한 선진국들에 본거지를 둔 다국적기업들에게 유리한 신자유주의 무역정책을 답습하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급진적 좌파는 모든 국제기구를 무조건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평등주의적 원칙에 기반해서 운용되는 국제기구들은 가치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급진적 좌파 내에 여전히 국민국가에 강한 초점을 두는 목소리들도 적지 않다. 존 롤스와 같은 자유주의적 평등주의자들은 자기들의 정치적 원리가 국제사회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명백히 밝히면서, 그 원리가 현존하는 국가 정치 공동체에만 적용된다고 주장한다. 민주사회주의자 역시 오랫동안 국가 공동체의 중요성에 주목해 왔다. 마이클 샌들은 효과적인 자주적 거버넌스를 가능하게 하는 시민적 덕성을 가진 시민들을 국가 차원에서 많이 육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급진적 좌파는 인간이 수많은 정치 공동체에 속해 있고, 다양한 자발적 결사체에 참여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급진적 좌파 내의 다양한 목소리들은 사회연대, 평등, 강한 민주주의 등의 가치를 모든 공동체에 전파하려는 의지를 지니고 있다. 급진적 좌파는 정치 공동체 내에서 공통의 경험과 사회연대를 얻는 수단으로서 ‘관여’engagement 또는 ‘참여’participation의 가치를 중시한다. 급진적 좌파는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힘을 합쳐 활동하는 과정과, 사람들 사이에서 더욱 사회주의적인 에토스를 키울 수 있다는 희망 모두가 전향적인 공동체 건설에 도움이 된다고 본다.


급진적 좌파는 오늘날 스포츠 경기장에 따로 마련된 특별관람석이야 말로 이런 사회연대의 크나큰 상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지적한다. 관람객을 신분에 따라 나누고, 시민들의 공통된 경험을 줄이기 때문이다. 급진적 좌파가 공통의 경험을 강조하는 이유는 시민들이 서로를 알고, 공통의 기억을 가지며, 자신과 다른 입장에 처해 있는 사람들을 공감하며 연대하기 위해서다.



7. 정치적 원리 2: 시민권


-다중적이고 심층적인 시민권-

급진적 좌파는 사람들이 일차적으로 한 국민국가의 시민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급진적 좌파는 대다수 사람들이 어떤 의미에서는 수많은 공동체에 속한 구성원이기도 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런 다중적 귀속성은 우리의 공적인 삶의 일부를 이룬다. 이는 다중적 귀속성들이 정치적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모든 다원주의자들이 여러 공동체에 대한 다중적 귀속성을 선호하지만, 급진적 좌파는 이런 귀속성을 ‘다중적 시민권’multiple citizenship 으로 부르고 싶어하며, 이런 다중적 시민권에 부수되는 광범위한 권리와 책임을 강조한다. 


어떤 나라에서 대대체 ‘누가 시민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급진적 좌파 내의 대다수 관점들이 언젠가는 모든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나라에서 마음대로 살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고대하지만, 이민정책을 규제할 수밖에 없었던 자유주의자와 마찬가지로 급진적 좌파 역시 완전한 이민 개방이 어렵다는 현실을 이해한다. 영향력있는 시민적 공동체주의자인 마이클 왈저Michael Walzer 는 완전 개방적 이주 정책이 시행되면 각국이 “인격을 지닌 공동체”가 될 수 있는 역량을 잃게 될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세계주의적 이론가들은 전 지구적 차원에서 정의를 추구하는 것에 더욱 열의를 보이고, 시민적 공동체주의와 현대 자유주의 및 여타 다원주의자들보다 더욱 개방적인 이민정책을 주창하곤 한다. 


급진적 좌파가 생각하는 시민권 개념은 현대 자유주의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참여, 권리, 책임이 내포된 개념이다. 급진적 좌파는 자유주의자들보다 훨씬 더 철저한 시민들의 참여를 촉구한다. 시민 참여는 가족과 학교와 교회와 지역사회 집단, 그리고 일상적인 직장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급진적 좌파는 광범위한 시민 참여를 추구하면서도 그것을 달성하기가 어렵다는 점을 잘 안다. 


급진적 좌파 가운데 시민적 공동체주의는 시민들에게 다양한 시민적 덕성을 주입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해왔다. 그런 덕성이 시민들을 더욱 효과적인 참여자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시민들은 자신의 이해관계에만 신경을 써서는 안된다. 공익과 사회정의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시민들은 공적인 목적을 위해 시간과 정열을 기꺼이 투자해야만 한다. 


급진적 좌파는 자유주의 정부가 시민들에게 제대로 된 책임을 부과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기껏해야 자유주의에서는 시민의 권리와 책임을 일대일로 연결시킬 뿐이다. 급진적 좌파는 시민들이 덜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더 멀리 내다보는 혜안을 통해, 사회계약의 진정한 의미를 해석해야 한다고 믿는다. 사회주의적 사회계약론에서는 사회계약이란 개인들이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서로 간에 맺은 약정이라고 보지 않고, 시민들이 공통적으로 가진 필요와 그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상호 협력해야 할 책임을 폭넓게 이해하는 것이라고 본다.


자유주의자는 급진적 좌파의 광범위한 시민권 제안을 경계하는 편인데, 오스카 와일드 Oscar Wilde, 1854~1900는 공적 참여보다 사적인 여가활동을 더욱 선호하는 자유주의적 성향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사회주의의 문제는 개인적인 저녁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급진적 좌파는 이런 식의 비판에 대해 사유주의의 믿음에 의문을 제기하는 방식으로 역비판하면서 모든 삶이 사회적 삶이라고 주장한다. 급진적 좌파는 사람들이 의사 결정에 참여할 필요가 있음을 인정해 그렇게 행동하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 내에서 타인에 대한 책임을 수행하면서 공동체 전체의 조화와 사회적 평등 및 정치적 민주주의라는 목표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8. 정치적 원리 3: 사회구조


-시작 사회주의와 민주적 문화를 추구한다-

급진적 좌파는 자본주의의 제도와 과정 및 도덕적 가치 등이 현대사회의 특징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본다. 자본주의의 힘이 지나쳐서 정치 공동체에 온갖 바람직하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고 본다.


첫째, 자본주의는 경제적 분배 과정을 지배한다. 급진적 좌파에 따르면 의료와 같은 필수적 서비스는, 환자의 부담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환자의 필요에 따라 분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둘째, 자본주의는 사람들이 보통 상황이라면 손대지 않을 일을, 생존을 위해서라면 억지로라도 하게끔 강요하는 식으로 인간의 자유를 제한한다. 셋째, 자본주의는 국가를 지배한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정부 정책을 왜곡한다. 넷째, 자본주의는 자본을 소유하고 관리하는 사람들이 노동자 및 소비자와 일반 대중을 좌지우지할 수 있게 해준다. 요즘 급진적 좌파 내의 여러 목소리들은 자본의 소유자가, 투자를 통해 수익을 올릴 권리를 가진다는 점은 받아들이지만, 이들은 그런 소유권을 근거로 자본가들이 자본의 사용에 대한 중요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력을 독점할 권한을 부여받았는지에 관해 의문을 제기한다. 급진적 좌파 내의 사회주의자들은 직장 민주주의workplace democracy가 없기 때문에 자본가가 피고용자를 불법적으로 지배한다고 오랫동안 주장해 왔다.  다섯째, 자본주의는 가족생활도 지배한다. 급진적 페미니즘은 자본주의가 가부장적 가족을 만들어 낸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여섯째, 자본주의는 사회의 문화를 지배하면서 구성원의 가치관을 결정하고, 무릴의 획득과 경제 발전을 사회의 지고지순한 목표로 만든다. 급진적 좌파는 자본주의가 시민의 욕망을 조종한다고 주장한다. 그 결과 경쟁적인 자본주의 체제는 사람들에게 부와 권력 및 지위를 일차적인 삶의 목표로 추구하도록 만든다. 마지막으로, 자본주의는 인간의 심리를 지배하면서 자긍심과 자신감을 좀먹는다. 자본주의적 가치가 삶을 지배할 때 경제적 경쟁에서 실패한 사람은 자신을 경제적 패배자로 볼 뿐만 아니라, 삶의 낙오자로 보는 경향이 있다. 급진적 좌파는 이 모든 문제의 근저에 자본주의가 있다고 생각하므로 “자본주의의 부정적 경향에 대해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라는 말을 듣는다. 


어쨌든, 급진적 좌파는 자본주의의 완전한 폐지를 모색한다기보다 경제, 사회, 정치적 삶을 지배하지 못하게끔 자본주의를 억제하려 한다. 급진적 좌파는 사유재산을 철폐하기보다, 사유재산을 가진 사람들이 누리는 혜택을 제한하려 한다. 급진적 좌파는 절대적인 경제적 평등을 모색하기보다 부의 집중에 수반되는 과도한 허영, 사치, 권력을 규제하려고 한다. 급진적 좌파는 세상을 개혁하고 싶어 하므로 다원적 정치 공동체에 존재하는 경제, 정치, 사회, 문화적 제도들을 동원하여 더욱 평등하고 민주적인 사회를 지향하는 쪽으로 나아가려고 한다. 급진적 좌파는 현대 자유주의보다 더 근원적인 변화를 원하므로 다원주의자들이 통상 추구하는 사회구조보다 훨씬 폭넓은 변화를 모색하곤 한다. 


초기 민주사회주의자는 강력하게 중앙 집중화된 국가가 대다수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많은 경제적 재화를 분배하는 사회구조를 모색했다. 그러나 최근 들어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와 시민적 공동체주의에서는 더욱 분권화된 사회구조를 강조해 왔다. 예를 들어, 롤스는 ‘사유재산제를 인정하는 민주주의’property-owning democracy 를 주장했다. 시장 사회주의market socialism 를 통해 중앙정부는 대중교통이나 통신과 같은 경제적 힘에 의해 ‘자연적 독점’natural monopoly 현상이 일어나는 경향이 있는 분야 산업에서 ‘국유화된nationalized 기업’을 소유하고 관리한다. 사회주의자는 정부 기관이 국유화된 분배를 통해 꼭 필요한 재화를 제공해야 한다고 오랫동안 주장해 왔다. 그러나 시민적 공동체주의에서는 국유화된 분배를 담당하는 국가기관이 지나치게 큰 역할을 담당해 인간들 사이에서 우애의 가치가 저하되지 않을까 염려한다. 


여타 다원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급진적 좌파는 역시 자발적 결사체가 사회구조를 구상하는 역할을 인정한다. 사회주의자는 문화 규범이 사회구조를 창안하는 역할을 자유주의자보다 더욱 중시한다. 일반적으로 급진적 좌파는 자유주의적 가치가 집단적 목표 달성, 사회연대, 사회적의, 지속가능한 환경 등의 가치로 보완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급진적 좌파는, 자본주의가 현대사회를 완전히 지배하고 있으므로 자본주의 자체를 완전히 붕괴시키지 않는 한 좌파적 방향으로 문화적 가치를 변화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보는 마르크스주의적 믿음을 거부한다. 대신 그들은 교육과 설득을 통해 문화적 가치를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견지한다. 


9. 정치적 원리 4: 권력의 보유자


-더욱 포용적이고 참여적인 민주주의-

급진적 좌파는, 그 어떤 정치 이념보다도 더 많이, 시민들의 개입을 통해 ‘강한 민주주의’strong democracy 를 실현하고자 한다. 급진적 좌파는 시민들이 자본주의의 지배에 항거하고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더욱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고 본다. 급진적 좌파는 자유민주주의가 자본주의를 적절하게 제어하지 못한다고 판단한다. 따라서 급진적 좌파는, 정치권에서 사회당과 녹색당 및 기타 좌파 정당들의 대표성을 확대하고, 직접민주주의의 수단을 더 자주 활용하며, 노동 현장을 더 민주적으로 만들고, 일상생활의 여러 조직들 내에서 더 평등한 권력 분포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정치 공동체 내에서 자본주의의 영향력을 되도록 줄이려고 노력한다. 일반적으로 급진적 좌파는 ‘쟁의적 민주주의’를 수용한다.


민주사회주의자는 사회주의의 이상을 실현하려면 마르크스가 예견한 혁명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장기간의 발전 과정을 통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급진적 좌파는 대의 민주주의의 필요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현대 자유주의가 추구하는 많은 개혁조치들을 지지한다. 급진적 좌파 가운데는 노동계급의 영향력 확대뿐만 아니라, 소외된 시민들의 집단을 발굴하여 정치에서 그들의 참여와 조직 및 목소리를 확대하려는 이들도 있다. 이들은 국민의 대표들이 소외된 시민들의 어려움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도록 압력을 넣을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한다. 이 가운데 직접민주주의의 수단-예컨대, 주민 발의, 주민 투표, 주민 소환-을 강조하는 방법이 있다.  급진적 좌파의 일부는 주민 발의, 주민 투표, 주민 소환을 할 수 있는 규정이 투표권의 영향력을 크게 확대하며, 시민들에게 사회주의, 환경운동, 여성운동 및 기타 여러 소외 계층들의 목표에 합치되는 정책을 직접 제정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한다고 믿는다. 


자본주의 경제체제 내의 가장 강력한 조직들이 사적으로 소유, 관리되고 있으므로, 급진적 좌파는 직장 민주주의를 중요한 목표로 간주한다. 또 급진적 좌파는 풀뿌리 민주주의를 지지한다.



10. 정치적 원리 5: 정부의 권위


-공적 영역을 확장한다-

급진적 좌파는 현대인들이 직면하는 대다수 문제를 정부의 개입이 필요한 사회문제로 파악한다. 급진적 좌파는 자유주의 정부가 통상 자신의 권의(권한)를 동원해서 사회문제의 근원-또는 궁극적인-을 파헤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급진적 좌파는 교육에 관한 자유주의의 접근 방식을 거부하지는 않지만 이런 방식이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급진적 좌파는, 학교가 학생들에게 수동적인 시민이 되라고 가르칠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민주 사회 내의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으로 자라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하기 위해 정부 당국은 공립학교위 모든 학생들에게 평등한 기본 교육을 제공해 주어야 하고, 이런 학교가 다음과 같은 압력을 받지 않도록 보호해 주어야 한다. 


급진적 좌파 내의 여러 복소리들이 사회문제의 근본 원인을 해결 하기 위해 정부의 권위를 동원해야 한다는 점에 동의하지만, 이들이 중시하는 문제는 모두 다르다. 급진 페미니즘은 가부장적 가족제도를 타파하기 위해 정부의 지원을 모색했다. 심층 녹색주의는 자연 자원을 보호하기 위해 정부의 규제가 필요하다고 역설해 왔다. 민주사회주의는 공공재의 생산과 소비, 시장규제, 그리고 자본주의에서 생산한 재화를 재분배하는 정부의 광범위한 역할을 특히 강조해 왔다. 급진 민주주의는 다문화주의를 지원하는 정부 정책을 모색해 왔다. 급진 페미니즘은 제한 정부를 강조하는 자유주의의 입장 및 자유주의에서 말하는 공사 영역 구분에 대해 ‘사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모토를 내세우면서 직접 비판을 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들은 모든 가족과 사적 영역에 정부의 권위(권한)가 동원되어야 한다고 선언하는 것은 아니다. 예로, 낙태와 같은 여성의 자기 몸에 대한 통제권은 순전히 개인의 결정이라고 믿는다. 다만 ‘사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슬로건은 즉, 가족 내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정치적 의미를 담고 있으므로, 간혹 정부의 개입이 정당한 경우가 있다는 말이다. 특히 가족 내 폭력 문제는 이제 남편과 아내 사이의 사적인 일로 치부되어서는 안된다. 이 경우 경찰과 법원이 개입해야 하고, 더 일반적인 차원에서, 자녀 양육과 가사에서 부부간에 불평등이 사라지지 않기때문에 정부가 보육 프로그램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심층 녹색주의는 정부에 대해 환경을 보호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위해 더 큰 권위(권환)를 행사하라고 촉구한다. 


급진적 좌파 내의 많은 목소리들이 경제 영역에서의 정부의 권위(권한)를 확대하려고 노력해 왔다. 시민적 공동체주의는 상품 시장과 노동시장을 존중하지만, 이들은 결국 넓은 의미에서 인민의 의지를 들어야 하며, 정부의 권위(권한)는 인민의 의지에 따라 행사되어야 한다. 마이클 왈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회적 생산을 할 때 사회적으로 인정된 필요 충족이 우선적인 이무가 된다. 사회적 필요가 충족될 때까지 잉여 수익은 있을 수 없다. 잉여 수익으로는 필요의 영역 너머에 있는 상품의 생산과 교환을 부담한다. 사회적 필요가 충족되지 않는 상태에서 자기 자신만을 위해 거금을 전유하는 사람은 독재자와 다를 바 없다. 그런 사람은 사회의 안전과 복리의 분배를 지배하고 왜곡하는 장본인이다. 


시민적 공동체주의는 정부의 권위(권한)가 공적 영역을 우선시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이런 사회적 필요가 충족된 후에야 시민들이 각종 경제적 재화 또는 상품에 대한 개인적 욕망을 추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존 롤스와 같은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자 역시 강력한 국가를 요구한다. 국가는 자신의 권위를 적극적으로 행사하여, 대다수 국가에 존재하는 것 보다 더욱 평등한 사회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정부는 ‘사회적 최소치’를 보장해야 하고, 누진세를 통해 그런 복지 예산을 충당해야 하며, ‘일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직장을 구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상식적으로 가능한 수준의 완전고용’을 달성하기 위해 전체 경제를 규제해야 한다. 민주사회주의는 경제적 재화의 생산과 분배에서 확장된 정부의 권위가 갖는 역할에 대해 가장 명확하고 잘 발전된 사상을 제시한다. 수정 사회주의자와, 페이비언 사회주의의 창시자들은 경제 생산에 초점을 맞추었고, 산업의 국유화를 지지했다. 이들은 국유화가 공동체의 조화를 증진할 것으로 믿었다. 생산을 결정할 때 시장의 힘에 대응하는 식이 아니라, 사회적 필요를 이성적으로 평가해서 정하기 때문이다. 또한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자가 더는 노동자들을 지배하지 않으므로 국유화 조처는 진짜 자유를 가져다 줄 것이고, 국유하는 사회, 경제적 평등을 촉진할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정부가 소유한 산업체에서 일할 때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 사이의 계급 구분이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는 다음과 같은 인식, 즉 자유 시장이 개인의 즉각적인 결핍을 해소해 줄 수는 있지만, 장기적인 (사회적)필요를 해소해 주기는 어렵다는 인식에 의거하여 국가 계획경제를 정당화한다. 사회주의자는 국가 계획경제가, 계획하지 않고 규제되지도 않는 시장에 비해, 단기적 ‘욕구’wants 와 장기적 ‘필요’needs 사이의 균형을 더 잘 맞출수 있다고 믿는다. 사회주의자는 (소유하기를 원하지만 생필품은 아닌) 대부분의 상품이 시장을 통해 분배되어야 한다는 점은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모든 사람이 원하지만 흔히 감당할 형편이 못 되는 재화만큼은 국가가 보편적인 권리로서 분배해 주어야 한다고 믿는다. 


사회주의 복지국가는 자유쥬의 복지국가보다 두가지 측면에서 더욱 광범위하다. 첫째, 사회주의자는 사람들의 최저한의 필요를 자유주의자가 생각하는 수준보다 훨씬 넓게 잡는다. 둘째, 자유주의자는 빈곤층의 필요에 초점을 맞추고 흔히 특정 집단의 권리를 보장해 주기를 원하곤 하지만, 사회주의자는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인 필요를 충족할 권리가 부여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사회주의 복지국가는 자유주의 복지국가보다 더 보편적이다. 사회주의자는 사회적으로 인정된 필요가 ‘보편적 권리’universal entitlements로 전환되며, 보편적 권리가 궁핍한 상태에 놓여 있는 사람에게만 제공되는 것이 아니라, 공통의 시민적 소속성(시민권)에 근거하여 누구에게나 제공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사회주의자는 보편적 권리를 여러 가지 근거에서 옹호한다. 첫째, 보편적 권리는 공통의 시민권을 인정하는 개념이다. 예로, 가난한 형편의 어머니뿐만 아니라 직업을 가진 여유 있는 어머니도 질 좋은 주간 보육 시설이 필요하기는 마찬가지다. 둘째, 사회주의자는 중산층과 상류층이 자유주의 복지국가에 대해 반감을 가지는 것을 방지하는 중요한 대응책으로 보편적 권리가 유용하다고 본다. 셋째, 사회주의자는 보편적 권리 정책을 시행해도 빈곤층을 대상으로 하는 정책 못지않게 생활 조건의 평등을 촉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식으로 새로운 보편적 복지가 제공되면 부유층의 삶의 질보다, 빈곤층의 삶의 질을 훨씬 더 향상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사회주의 국가에서 보편적 복지는 통상 누진세로 충당하는데, 부유층은 이때 빈곤층보다 더 많은 세금을 내므로, 부유층과 빈곤층 간의 경제적 불평등이 완화될수 있다. 특히 다문화주의의 지지자들은 보편적 권리에 덧붙여 ‘특수 집단 권리’도 함께 제공해야 한다고 믿는다.


고전적 자유주의는 사람들을 ‘의지를 가진 존재’volitional beings 로 파악하고, 현대자우주의는 사람들을 ‘목적을 가진 존재’로 파악한다면 사회주의는 사람들을 ‘사회적 존재’로 파악하고, 사람들의 욕구와 필요는 사회, 문화적으로 규정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사회주의에서 사회계약은 ‘우리의 공동퇸 삶에서 어떤 재화가 필요한지를 함께 결정하고, 그것을 서로 제공해 주겠다고 약속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11. 정치적 원리 6: 정의


-더 평등한 사회를 추구한다-

급진적 좌파 내의 모든 목소리들은 사회적 재화가, 규제되지 않은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분배되는 것보다 더 평등하게 분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급진적 좌파는 ‘사회적 정의’를 추구하지만 그들이 사회적 재화의 특정한 분배 상태를 정의로운 것으로 규정하지는 않는 편이다. 이들은 자본주의에서는 사람들이 재산을 모으기 위해 타은을 착취하는 경우가 많고, 빈곤층이 갖가지 형태의 억압을 당하기 쉽다고 주장하며, 소득과 재산의 분배가 정의롭지 않다는 결론을 내린다. 


급진적 좌파에 따르면 자본주의가 재화를 공평하게 분배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유 시장을 시행하는 다원적 사회에서 가장 기초적인 차원의 정의 운용 원칙이 ‘기회균등’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급진적 좌파는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의 정의개념인 ‘형식적 기회균등’과 현대자유주의자들의 정의 개념인 ‘공평한 기회균등’의 중요성을 부정하지 않지만, ‘기회균등이라는 개념이 ‘완전한 정의’라는 개념만큼이나 적절치 않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급진적 좌파는 기회균등을 넘어선 ‘평등’개념을 중시한다. 그라나 이들은 모든 사람이 완전히 똑같은 교육, 재산, 권력 및 사회적 재화를 가진 사회는 존재할 수 없고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점을 인정한다. 급진적 좌파는 기회균등보다는 더 많은 평등을, 그러나 조건의 평등보다는 더 적은 평등을 창조해 평등주의 사회를 건설하려고 한다. “이런 사회는 모든 사람이 서로를 동등한 가치와 잠재력을 가진 형제와 자매로 보는 사회다.”


급진적 좌파 내의 모든 사상은 이런 평등 사회를 추구하려는 기본 관점을 공유한다. 첫째, 불평등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해야 하고, 불평등을 어덯게 정당화할 수 있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재산과 권력 및 기타 재화의 불평등이 정당한 경우라 하더라도, 그런 불평등을 줄일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셋째, 불평등한 분배에 따르는 폐단을 줄일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존 롤스는 [정의론]에 따르면 첫째, ‘평등한 자유의원칙’은 모든 사람에게 폭넓은 평등한 기본적 자유 체계를 제공한다. 둘째, ‘차등 원칙’은 평등을 유보할 수 있는 경우를 특별히 규정한다. 

급진적 페미니즘과 시민적 공동체주의에서는 더 많은 소득분배나 재산 분배를 겨냥한 정책만으로는 가족 및 지역공동체 내에 존재하는 불평등한 인생 기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급진적 페미니스트는 가부장적 가족제도가 여성에게 대부분의 가사와 자녀 양육 책임을 부과하기 때문에 여성이 억압을 당할 수 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이들은 이런 과제를 공평하게 나눠 가정에서부터 정의가 시작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시민적 공동체주의에서는 거주지에 따라 사람의 인생 기회가 크게 달라진다고 지적한다. 존 롤스는 자신의 정의론이 국경선으로 한정된 일국적 사회를 위한 이론임을 분명히 밝혔지만, 세계주의에서는 전 지구적 정의 원칙에 따라 전 지구적 불평등을 완화해야 한다고 믿는다. 따라서 세계주의자들에 따르면 국경선을 완전히 개방하고, 부국의 시민들로부터 빈국의 시민들에게 자원을 재분배하는 방안에 초점을 맞춘다. 부국과 빈국 사이의 재분배는 흔히 ‘인권’이라는 근거에서 정당화된다. 



12. 정치적 원리 7: 변화


-더 많은 민주적 평등을 향한 진화적 발달-

급진적 좌파는 현대 자유주의보다 더 철저한 변화를 원한다. 자유주의에서는 국가가 시장의 구체적인 실패 사례만을 교정해야 한다고 보는 반면, 급진적 좌파는 지역사회, 국가, 전 세계 차원에서 각종 민주적 과정들을 도우언해 자본주의를 더욱더 통제해야 한다고 본다. 급진적 좌파는 자유주의와는 달리 사회적 배경이 서로 다른 사람들 간의 진정한 공동체적 유대를 지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급진적 좌파는 심각한 불평등이 제거되었더라도 그 뒤에 남는 일반적인 불평등 역시 거의 대부분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급진적 좌파는 인간 삶의 모든 역역에 민주적 가치와 민주적 과정이 더욱 심층적으로 스며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급진적 좌파 내의 다양한 목소리들은 각기 다른 근본적 변화에 초점을 둔다.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에서는 다원적 사회 내에서 사회적 재화가 불평등하게 분배되는 현실의 정당성에 의문을 가하지만, 세게주의에서는 선진국, 개도국, 저개발국 사이에 자원이 불평등하게 분배되는 현실의 도덕성을 의문시 한다. 급진적 페미니스트와 인종적-종족적 소수자 집단의 지도자는 여성과 유색인들이 억압받는 혀실을 개탄하면서, 가정 내에서 남성과 여성의 평등 미 시민사회 내에서 백인과 유색인의 평등을 요구한다. 녹색주의자와 무분별한 도시 개발을 반대하는 진보주의자는 건강한 환경을 지키고 다양한 사회적 가치를 보호하기 위해 자본주의와 기업의 이익 추구와 ‘성장 만능 추세’를 더욱 철저히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20세기에는 민주사회주의가 이를 감당했지만, 오늘날 급진적 좌파 내의 다양한 목소리들이 하나의 단일한 정치적 이념속에 포함될 수 있을지는 좀더 두고봐야 한다. 한 세기 전에 베른슈타인은 정통 마르크스주의와 공산주의가 원했던 혁명적 변화가 아니라 진화적 변화에 충실한 사회주의 노선을 취해야 할 몇 가지 근거를 제시했다. 첫째, 20세기 초에 베른슈타인은, 마르크스가 혁명을 위해 필요하다고 내다봤던 객관적 조건이 출현할 가망이 없어 보인다는 점을 인정했다. 자본주의는 혁명에 필요한 대규모 실업 상태를 낳지 않았다. 둘째, 베른슈타인은 이미 한 세기도 전에 공산혁명의 주관적 조건 역시 위축되고 있음을 지적했다. 그는 노동계급이 더 강성해지거나 더욱 단결하고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오늘날의 급진적 좌파는 자본주의의 계급구조가 복잡해지면서, 재산을 소유한 소수의 자본가들로 이루어진 착취계급과, 재산이 없는 다수의 노동자들로 이루어진 피착취계급으로만 사회가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중간계급들-관리계층, 기술자, 교사, 공무원, 사무직 노동자, 고숙련 생산직 노동자-이 생겨났다고 본다. 셋째, 베른슈타인은 20세기 초엽에  서구의 일부 산업국가들에서 자본주의를 규제하고 재화를 더욱 공평하게 분배하기 위해, 사회주의 정당의 권력 쟁취와 국가권력의 활용을 촉진하는 방식으로 민주화를 달성했다고 주장했다. 급진적 좌파는 전 세계에서 지속적으로 민주화가 진행되고 있으며, 많은 사회주의 정책들이 성공적으로 수행되는 현실을 지적하면서, 민주주의를 향한 진보가 경제와 사회를 진화시켜 사회주의로 나아갈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을 보여준다. 급진적 좌파는 혁명이 지속적인 변화를 낳을 수 있는지에 대해 오래전부터 회의적이었다.


사회주의자는 혁명적 변화보다 ‘개혁’reform’이 훨씬 더 내구력이 강하다고 믿는다. 시드니 웹은 일견 보수주의자와 비슷하게 들리는 주장을 남기기도 했다. 


-유기적 변화-

1) 민주적 변화로서, 대다수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 2) 점진적 변화로서, 혼란을 야기하지 않는 수준의 변화. 3) 인민 대중에 의해 부도덕한 조치라고 생각되지 않는 변화. 4) 합헌적이고 평화로운 방식의 변화


20세기 후반부 영국의 저명한 정치 이론가였던 버나드 크릭은 진화적 –그러나 궁극적으로 대단히 심대한 - 변화를 달성하는 과정을 세 가지 시기로 구분했다. 첫째, 어던 행정부 혹은 입법부의 임기에 해당하는 단기적 시기에, 급진적 좌파는 자본주의 체제의 가장 급박하고 특정한 문제에 집중해야 하고, 향후 사회운동에서 대중의 정치적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시민들에게 구체적인 물질적 혜택을 부여해야 한다. 둘째, 지금부터 20~25년 내의 중기적 시기에, 급진적 좌파는 다음 세대의 가치관을 바꿀 수 있어야 한다. 셋재, 먼 미래를 내다보는 장기적 관점에서 이상적 사회를 상상ㅇ해야 한다. 급진적 좌파는 역사라는 것이 결국 일종의 ‘대장정’a long march 이며, 사회주의적 이상을 향해 (어쩌면 마지막 지점에 도달하기 어려울 수도 있으나) 민주주의적 수단을 계속 적용해 나아가는 과정임을 잘 알고 있다. 


마지막으로, 급진적 좌파는 (마르크스주의자와 달리) 이상 사회의 구현 또는 이상 사회를 향한 전진이 필연적이라고 보지 않는다. 급진적 좌파가 필연적이라고 보는 점은 인간의 미래에 대단히 큰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는 점뿐이다. 자본주의와 기술력과 과학은 끊임없이 “인간 삶의 조건 자체를 획기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그런데 이런 변혁이 퇴행적인 변화일 수도 있다. 고립된 개인주의를 부추기고, 실질적 자유를 줄이며, 불평등을 증가시키고, 소수의 지배 엘리트의 힘만 강화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또는 그런 변혁이 사회주의적 가치를 더 크게 구현하는 쪽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그러므로 급진적 좌파의 과업은, 더욱 사회주의적인 사회를 향해 사람들이 ‘수많은 작은 조치들’many small steps 을 계속 취하게끔 영감을 불어넣어 주는 방식으로 사회주의의 원칙을 명확하게 천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책 '진보와 보수의 12가지 이념' 중 급진적 좌파에 대한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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