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통합의 아버지라 불리는 장모네, 그는 누구인가?


유럽통합의 아버지라 불리는 장모네, 그는 누구인가?




 장 모네의 활동으로 인해 2차 세계대전이 1년이나 단축되었다”_케인즈 


2002년 프랑스와 데스쿠엣 주한 프랑스대사가 국민대 초청강연에서 장 모네에 대해서 강연할때 한 말이다




제도의 생명은 사람의 생명보다 깁니다. 만약 제도가 잘 만들어 진다면 그 제도들은 여러 세대의 지혜를 축적하고 전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 -장모네



1. 장 모네는 누구인가?

 


<유럽통합의 아버지라 불리는 장모네>


장 모네는 코냑 마을의 코냑 중개업상인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당시 막 태동해서 조직화된 사회보장제도에 부응하던 상호공제회에서 자선일을 했다. 그의 아버지는 그 일을 통해 공공선을 위해 봉사했다. 장 모네는 학교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고 책에서 얻는 지식을 달달 외우는 것도 싫어했다. 그리고 그는 일찍이 사고는 행동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터득했고 이후 그의 행동준칙이 되었다. 장 모네는 가족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특히 가업이 코냑 중개업 상이었기 때문에, 다양한 고객들을 접하면서 국제문제에 관해서 많은걸 배웠다. 장 모네의 아버지는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하는 특성 때문에 다른 나라에서 온 상인들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가족 식사 중에 국제문제를 얘기하는 것은 보통이었다. 물론 여기에 특별한 집착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또 지방색을 넘어서겠다는 문제의식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다만, 전 세계의 변영과 취향의 변천이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뿐이다.”(p.45)

 

이렇듯 그의 가족환경은 유난히 국제적인 일들에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이러한 일상이 장 모네에게 많은 배움을 주게 된다.

 

나는 그때, 혹은 그 때로부터, 어떤 전문적인 교육에서보다도 사람과 국제문제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웠다.”(p.42)

 

나는 그들이 처한 문제들과 우리에게 제기된 문제들을 구분하지 않고 생각하는 습관이 생겼다.”(p.44)

 

그리고 아버지의 사업을 보면서 자란 장 모네는 사업관계 이상의 무언가를 발견하게 되는데, 바로 우정과 상호간의 신뢰였다. 이후 장 모네는 국제연합에서도 신뢰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러한 가족환경이 결국 나중에 장 모네가 유럽통합을 꿈꾸게 되는 원천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프랑스 전체가 민족주의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던 그 시기에, 코냑 사람들은 민족주의자들이 아니었다...내가 나중에 인위적으로 분열된 사람들이 단합하여 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필요한 바를 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환경 덕택일 것이다. 나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 사이에 차별을 둔 적이 절대 없다.”(p.47)

 

장 모네는 건강상 병역부적격 판정을 받아서 군 소집통지서를 받지 못했다. 모두가 전쟁이 금방이라도 끝날 것 같은 생각을 가지고 애국심으로 전장으로 뛰어갈 때 장모네 또한 자기 스스로도 조국에 봉사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이 유용한 곳이 어디인지를 찾던 중에 깨달았는데 바로 전쟁수행의 국가 간 조정이라는 역할이었다. 이 부분만 봐도 젊은 장 모네의 생각의 깊이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연합군이 전혀 해결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이 매우 중대한 문제가 발생할 것이 명백했다. 내가 젊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매우 젊었다는 그 사실 때문에 이러한 생각을 할 수 있었다.”(p.55)

 

젊은 나이에 국제관계를 이해하는 깊이가 있고, 또 어떤 부분이 가장 필요한지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

 

이는 20세기에 나타난 새로운 문제였으며, 선입관과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운 지성을 지닌 사람이 19세기적 관념 속에서 자라온 전문가들보다 훨씬 잘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후자의 전문가들은 역학의 조건이 변화하였고, 전쟁이라는 매커니즘이 일국이 지닌 모든 자원을 파괴할 것을 지향하고 있으며, 따라서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전례 없는 새로운 조직형태를 창출해내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p.55)

 

장 모네는 전쟁수행에서 독일에 대항한 연합국간의 새로운 형태의 조직체의 필요성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도 전쟁수행 국가 간 조정의 역할을 하는 곳에 자신이 있기를 원했던 것이다.

 


2. 59일 유럽의 날, 그리고 슈망선언. 이 모든 것은 모네의 작품이다.

 

장 모네는 전쟁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경제적인 측면에서 노력들을 공동으로 검토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즉 독일에 대항한 프랑스와 영국은 각각의 주체로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장 모네는 영불간의 경제적 자원에 대한 공동의 노력이 필요함을 주장한 것이다. 사실 이는 당시의 상황으로 볼 때 명백한 것이었다. 장 모네는 자신의 이러한 생각들을 주변에 나누고 실현시키기 위해 이를 받아들일 만한 사람을 찾았다. 사실 당시 프랑스 인들도 장 모네의 부친이 생각했듯이 동일하게 연합’(the Alliance)은 살아남기 위한 전제조건이고 신성한 것이라는 것에는 동의했지만, 승리라는 공통된 목표 하에 과제를 서로 나누어 각자의 임무를 수행하는 두 개의 군대가 병렬적으로 결합하는 것만으로 이해했다. 왜냐면 당시는 ‘1904년 불영화친조약(Entente cordiale)’이 체결된 것이 최근의 일이었고, 불영 양국 간의 친선도 한정적인 성격이었다. 게다가 런던의 자유무역주의와 파리의 보호무역주의는 잘 어울리기도 힘든 상태였다. 따라서 두 개의 서로 다른 체제 사이에 긴밀한 협조체계를 구축하는 것은 쉬운 생각이 아니었다.

 

장 모네는 2차 대전에서 독일에 대항해 승리하기 위한 유일한 길은 프랑스와 영국이 양국의 물자와 생산능력을 공동 관리하는 것뿐이라고 확신하고, 자원 공동 관리의 필요성과 더 나아가 연합의 필요성을 느꼈다. 특히 장 모네는 불-영간의 공군력 통합의 필요성에 대해 영불간의 통합을 주장했다. 그러면서 총리에 취임한 윈스턴 처칠에게 공군통합을 해야 한다고 직접 편지를 썼다. 더 나아가 장 모네는 영불연합’Anglo-French Unity 영문 보고서를 통해 영불간의 완전한 연합만이 최종승리에 대한 희망을 준다는 결론을 내린다. 따라서 양국 간에 운명공동체라는 인식을 만들어, 전후 복구에 대한 공동행동을 확인하고 전쟁수행상의 모든 문제 해결을 위하여 양국 의회를 합병할 뿐만 아니라 양국정부를 통합하여 하나의 내각을 형성한다는 획기적인 선언이 필요한 시기라고 진단하기도 했다. 장 모네가 말하는 영불간의 연합이란 완전한 통합, 즉 하나의 내각, 하나의 의회, 하나의 군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는 실로 획기적인 생각이었다. 당시 독일의 공세에 밀리고 있던 프랑스로서는 영국과의 통합, 적어도 공군 통합이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정치기업가로서 장 모네의 모습이다. 장 모네는 영불간의 완전한 통합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독일에 대항해야 한다고 했다. 즉 당시 전시상황에서 연합이 아니면 프랑스에 엄청난 위기였기 때문이다. 즉 장 모네가 연합까지 구상할 정도로 몰아붙였던 당시의 전시적 상황이 그 맥락 속에서 작동한 것이다. 평화의 필요성에 따른 연합의 구상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상황에서도 하나의 시민권, 공동의 화폐뿐만 아니라 관세동맹까지 폭넓은 정체성의 연합까지 구상할 수 있었던 것은 상황에 따른 필요가 있었다고 할지라도 실로 비전을 가진 청지기업가만이 가능한 부분일 것이다. 장 모네는 필요는 어떠한 망설임의 여지도 남겨놓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국제문제를 국민주권의 각도에서 바라보려고 하지 않았고, 여러 민족들이 같은 위험에 처해 있을 때, 그들의 운명을 결정할 다양한 이해관계들을 각각 개별적으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 부분 또한 하나의 정체성을 가진 공동체 연합을 구상할 수 있었던 동력이 아닐까.

 

EU 탄생의 역사는 195259슈망선언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바로 유럽석탄철강공동체 발족을 선언한 날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유럽석탄철강공동체에 대한 제안을 장 모네가 작성했다는 것이다. 장 모네는 익히 부터, 유럽에서의 전쟁의 불씨를 죽이려면 전쟁의 화약고인 석탄과 철강에 대한 탐욕을 줄이고 이를 공동관리 하는 것이 평화를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실로 현명한 생각이었다. 프랑스와 독일,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등 6개국이 합의한 것이다.

 

          유럽석탄철강공동체 창설 서문을 보면


           “오랜 경쟁관계를 근본적 이해의 통합으로 대체하고, 경제공동체를 설립함으로써....공동체의 토대를 만들고, 앞으로 나타날 운명공동체의 방향을 결정할 수 있는 제도적 기초를 놓는 것을 결의하면서, 유럽석탄철강공동체를 창설하기로 결정함..”

 

우리의 공동체는 단순히 석탄과 철강 생산자들의 연합체가 아닙니다. 그것은 유럽의 시작입니다.”

 

“1953210일 오늘 아침 이후로 더 이상 벨기에, 네덜란드,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혹은 룩셈부르크의 석탄은 없습니다. 오직 유럽 석탄만이 있어서 우리 6개 국가들 사이에서 하나인 양 자유롭게 이동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역사적인 선언이었다. 이렇게 유럽석탄철강공동체는 유럽연합의 획기적인 토대를 만들어주었다.

 

이에 이어 1957년에는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창설 조약에도 서명했다. 사실 당시 한국전쟁 발발은 유럽에게 단결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를 제공했다.

 

공동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자기 나라의 이익을 위해 협상하는 것이 아닌 우리 모두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서-우리는 이 자리에 있습니다.

 

신뢰를 형성하는 것은 보통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간단하다. 정확히 솔직함이 신뢰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한 비밀이다.

 


3. 연합, 유럽공동체

 

장 모네의 유럽통합의 사상적원천은 바로 위에서도 보았듯이 어려서부터의 가족환경에서 비롯된다. 코냑 중개업 상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세계 여러 곳을 돌아보면서 유럽 밖에서 유럽을 보는 관점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유럽연합, 통합 방식은 바로 공동이익을 체계화 하는 방식이었다. 즉 만장일치제 국제연하체가 아닌 공동으로 이해오 타협이 가능한 부분에서 먼저 통합하는 것이다. 이것의 모티브로 바로 유럽석탄철강공동체가 발족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공동체가 더 나아가 유럽연합으로 확장되게 된다.

 

<장모네의 아이디어인 석탄철강공동체 결성을 시작으로 결국 지금의 럽통합을 이끌어내게 되었다.>


실제로 현재 EU는 역사나 사상, 문화 분야에서는 서로 통합을 하자고는 하지 않는다. 즉 서로 다른 문화는 인정하고 존중해주는 것이다. 다만 단일 화폐와 같은 경제 분야에서 공동의 이익에서 합의 가능한 부분에서 먼저 통합하는 것이다. 바로 장 모네의 통합전략인 것이다. 예를 들자면 프랑스와 독일은 세기에 걸쳐 적대국으로 지내왔지만 통합을 이루었기 때문에 이 부분에서 아시아의 통합의 힌트를 얻을 수 있다.

 

평화는 동등함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습니다.”, “오직 제도만이 점점 더 현명해져갈 뿐이다. 제도는 집단적 경험을 축적시킨다.”(p.448)

 

“...나는 여러 가지 사건들을 통하여 규칙이 없거나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경우 사람들은 나약하고 경박해진다는 것을 매우 일찍 배웠기 때문이다.”(p.41)

 

우리는 우리의 개인적인 경험을 다른 누군가에게 물려 줄 수 없습니다. 그런 경험들은 우리와 함께 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후손들에게 제도를 남겨 줄 수 있습니다. 제도의 생명은 사람의 생명보다 깁니다. 만약 제도가 잘 만들어 진다면 그 제도들은 여러 세대의 지혜를 축적하고 전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p.438)

 


4. 그는 정치가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정치했다.

 

정치가로서의 기업가가 아니라 정치영역에서의 정치기업가를 말한다. 그럼에도 가장 효과적으로 개혁할 수 있는 사람은 정치인 개혁가이다. 특히 대표성이 있는 인물일수록 개혁이 쉽다.

 

정치인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agency slack’도 장 모네에게 해당되지는 않았다. 왜냐면 그는 최대한의 표를 위한 정치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장 모네를 정치기업가로서 높이 평가 할 수 있는 또 다른 한 부분이다. 따라서 그를 ‘ideologist’ 즉 이상주의에 가깝게 묘사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목적과 방향은 매우 실제적인 단계부터 한다는 어떠한 경험적 철학 같은 것이 있다.

 

나의 목적은 매우 실제적인 것이다. 원한다면 그것을 철학이라 불러도 좋다. 하지만, 본질적인 요점은 한 개인의 경험을 뛰어넘어 그것을 유용하게 만드는 것이다”(p.592)

 


5. 정치기업가로서의 장모네, pro-active?

 

정치기업가: 정치영역에서 공익을 위한 정치적 상품을 만드는 것이다. 정책이나 제도 등 공공재(public goods)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2차 대전 당시 유럽연합 혹은 공동체에 대한 요구(demand)가 있었는가? 장 모네는 기존의 유럽연합의 필요성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났는가?

 

정치기업가론의 관점에서 볼 때 사전 요구(demand)가 있기 전에 그 필요를 제공하는 사람을 'Pro-active'라고 부른다면 demand가 있은 다음 이를 수용해 반응하는 사람을 'Re-active'라고 부른다. 쉽게 말하면 Pro-active는 더 부지런하고 자기 구상이 뚜렷한 노력가라고 할 수 있다. 정치기업가론의 관점에서는 Re-active가 위험성이 덜 하고 무난한 측면이 있다. 왜냐면 정치인에겐 표의 극대화가 최종의 목표이기 때문에 표를 의식한(유권자들의 구미를 당기는) 정책을 택하는 것이 안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Pro-active한 정치인은 자신이 구상한 공공재 정책이 유권자의 환호를 살 수도 있지만 반대로 위험성도 가지고 있다. 이런 부담을 가지고도 과감히 demand가 있기 전에 공공재(정책)를 제안하는 정치인을 Pro-active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장 모네는 Pro-active 인가 Re-active인가? 핵심부터 말하자면 장 모네는 Pro-active한 정치기업가이다. 정치인이 아니었던 그에게 표의 극대화를 의식한 공공재 창출을 위한 노력이 굳이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즉 그의 유럽연합에 대한 필요와 구상이 스스로의 상황적 필요에 의한 판단이었지 시민들의 요구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정치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로부터 보다 자유로운 조건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만약 그가 프랑스의 고위 정치인이었다면 당시에 유럽연합이라는 공동체에 대한 아이디어가 아마 쉽게 나올 수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6. 그에게 사익은 무엇이었나?

 

장 모네에게 어떤 사익(private good) 때문에 국제연합이라는 거대한 공익(public good)을 창출하려고 노력했나.

 

흔히 정치인에게 공공재를 창출하게 하기 위해 사적 utility를 제공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고 이때 개혁이 일어나기 쉽다. 그러나 장 모네에게 사익은 기존 정치인들의 표의 극대화를 위한 만족은 분명히 아니었다. 즉 정치인이 아니었던 장 모네는 굳이 표를 의식한 공공재 창출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 어떤 개인적 만족이 그로 하여금 발 벗고 유럽연합이라는 공공재 창출을 위해 노력하게 했는가. 정치기업가론적 시각에서 사익을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다. 가장 보편적인 것이 바로 정치인의 사익은 표의 극대화이다. 그 외 만족할 수 있는 부와 권력이 될 수도 있고 명성과 지위나 더 나아가 개인적 만족이나 성취감 까지도 사익으로 넓게 볼 수 있다. 이러게 볼 때 장 모네에게 사익은 아마도 표의 극대화도 아니고 그렇다고 명성이나 지위도 아닌 것으로 평가된다.

 

나는 명성은 잊어버려야 한다. 사람들이 무어라고 하던 간에 나는 비밀주의를 특별히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만약 내가 나 자신을 숨기는 대가로 어떤 문제들을 잘 해결 할 수 있다면, 나는 남들 모르게 일하는 것을 기꺼이 택한다.”(p.268)

 

이로 볼 때 장 모네는 스스로도 명성을 위해 일하지는 않은 것으로 평가 할 수 있다.

 

국제 공공재는 어떻게 창출할까?’ 이에 대한 국제정치학자들의 솔루션이 패권국가의 등장이었다면 장 모네의 솔루션은 바로 국제연합의 소규모인 유럽연합이었다.

 

'to be someone' or 'to do something'의 개념이 있다. 정치기업가에 가까운 사람이라면 아마 후자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장 모네가 바로 여기에 해당된다. 물론 ‘to be someone’을 추구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가 공공재를 창출한다면 정치기업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면 그에게 utility는 지위나 명성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 모네는 유럽연합이라는 공동체의 필요성을 위해 노력하면서 정치가 혹은 특정한 지위를 목표로 한 것은 아니다. 그가 유럽석탄철강공동체에 핵심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핵심 역할을 맡고 이끌었지만 이는 그의 'to do something' 에 대한 집념의 과정의 결과로 지위나 명성이 주어진 것으로 평가된다. 물론 이에 대한 내적 만족이 있었으리라는 짐작하지만 이는 모호한 평가의 대상이기 때문에 제외한다.

 

정치인은 Re-active할 수밖에 없다. 왜냐면 표가 그들의 사적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 모네는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 것이다.

 


7. 정치꾼 vs. 정치기업가

 

장 모네는 정치꾼도, 정치가로서 정치기업가도 아니었다. 장 모네는 정치가보다는 전문가나 디자이너, 혹은 설계가, 설득가에 가까웠다. 장 모네는 그가 16세 되던 해에 처음으로 먼 곳으로 여행을 갔는데 바로 영국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게 된다.

 

나는 난생 처음으로 기존의 무언가를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개척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은 한계라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며, 어디가 경계인지 알지 못하였다. 끊임없는 역동성을 보이는 이곳에서, 난 불필요한 근심이자 시간의 낭비일 뿐인, 우리가 여러 세대를 통하여 물려받은 오래된 의심 많은 태도를 버려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p.51)

 

장 모네는 개척에 대한 무한한 변화와 진보의 가능성을 배우게 된다.

 

나는 사물을 보는 새로운 방식을 발견하였는데, 그것은 개개인의 진취적 행위는 사회 전체의 번영에 기여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이다.”(p.51)

 

변화를 조직화하는 것(to organige change), 나는 그것이 필요할 뿐 아니라 가능하기도 하다는 것을 깨달았다.”(p.52)

 


8. 관계를 중요시한다.

 

나는 누구건 간에 내 소규모 팀을 위해, 종종 긴 논의 끝에 고용한 사람과 팀의 분위기에 잘 적응한 사람을 잃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친숙한사람과 일하는 것이 좋긴 하지만, 새로운 임무로 인해 새로운 사람이 오거나 우리 쪽 사람이 가야한다면 이를 받아들였다. 이것이 바로 누구와도 인연을 끊지 않으면서 나를 돕는 사람들의 연속성을 유지하는 이유이다

 

그리고 장 모네는 최종 결정권이 있는 고위 지도자와 직접 대화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 같다. 윈스턴 처칠의 비서관이었던 데스몬드 모튼이 장 모네에게 한 충고는 지도자와 직접 대화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닫게 해 주었다. 왜냐면 장 모네가 이후 바로 처칠에게 직접 편지를 쓰고 이후 처칠뿐만 아니라 아데나워나 케네디, 루즈벨트 등에게도 직접 편지를 주거나 찾아다녔기 때문이다. 이는 중요한 포인트인데, 어떠한 사안에 대한 최종결정권과 영향력은 대개 지도자에게 직접 있기 때문이다.

 

장 모네는 유럽연합이라는 거대한 공동체 창출을 위한 노력이 시민들로부터는 불가능함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지도자에게 집요하게 접근하는데, 바로 처칠이나 루즈벨트 등 최종 결정권자에게 직접 편지를 쓰거나 만나서 자신의 구상을 피력한다.


 

9. 아시아에는 왜 장 모네가 없는가?

 

경제적 이익을 위한 아시아 통합 vs. ‘평화를 위한 아시아 통합인가

우리가 아시아의 통합을 주장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평화인가 각자의 이익 때문인가? 그리고 공동의 이익 통합 관리가 가능한 부분은 어디인가? 그리고, 아시아에는 왜 장 모네가 없는가? 라고 묻기 전에 자신이 장 모네가 되어보는 것은 어떤가!

 

 

-『유럽 통합의 아버지, 장모네 회고록』을 읽고-




 

이 글은 '정책과 정치리더십' 수업에서 다뤘던 장모네의 회고록을 읽은 서평이며, 모든 저작권은 이 블로거에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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