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최대의 사기, 농업혁명 [사피엔스]

[사피엔스] 제2부 농업혁명 

5. 역사상 최대의 사기




역사상 최대의 사기란?


인간이 250만 년간 먹고살기 위해 사냥 했던 동물들과 채집 했던 식물들은 스스로 자라고 번식한 것이다. 이건 인간이 개입하여 번식을 돕거나 한 게 아니다. 


호모 사피엔스들은 동아프리가, 중동, 유럽, 미대륙으로 퍼져나가고 가는 곳 마다 야생동식물을 채취하고 사냥하는 방식을 유지했다. 사실 이런 방식으로 먹고사는데 부족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여 다른 삶의 방식으로 전환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이러한 삶의 방식이 약 1만 년 전 달라졌다. 사피엔스들은 하루 삶의 거의 모든 시간과 노력을 몇몇 동물과 식물 종의 삶을 조작하는 데 바치기 시작했다. 해 뜰 때부터 해 질 때까지 씨를 뿌리고 작물에 물을 대고 잡초를 뽑고 좋은 목초지로 양을 끌고 갔다. 더 많은 과일과 곡물, 고기를 얻게 될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이게 바로 사피엔스들이 자신들의 생활하는 방식을 바꾼 혁명, 즉 농업혁명이었다. 


인류가 농업으로 이행한 것은 기원전 9500~8500년 경 터키 남동부, 서부 이란, 에게 해 동부 지방이었고 3500년경까지 가축화와 재배작물화했다. 최첨단 시대인 지금 우리의 주식인 밀 ,쌀, 옥수수, 감자 등은 당시 선조들이 작물화했던 한줌의 식물이라는 것이다. 


한때 학자들은 중동의 어느 특정 지점에서 농업이 시작되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고 믿었지만, 오늘날 학자들은 중동의 농부들이 자신들의 혁명을 수출한 게 아니라, 세계 여러 지역에서 완전히 독자적으로 생겨났다는 생각에 합의하고 있다. 서로 다른 지역에서 무엇을 재배하는 지 모른채 사피엔스들은 자신들의 거점에서 완두콩과 감자를 재배 했다는 것이다. 


기원후 1세기 쯤 되어 세계 대부분의 지역 사람들 대다수가 농민이 되었다. 중동, 중국, 중미에서 일어난 농업혁명이 호주나 알래스카, 남아프리카에서 일어나지 않은 이유는 그 지역에서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피엔스들이 지구에 있는 수천 종들의 식물과 동물중에 재배와 목축에 적합한 종은 몇종 밖에 안 됐다. 이것이 가능한 지역에서만 농업혁명이 일어났던 것이다.


한때 학자들은 농업혁명을 인간성을 향한 위대한 도약이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사람들이 진화하고 똑똑해져서 자연의 비밀을 알아내고 양을 길들이고 밀을 재배할 수 있게 되자 지겨운 수렵채집생활을 버리고 농부의 만족스런 삶을 즐기기 위해 정착 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이야기는 환상이다. 


시간이 흘러 사피엔스가 더 총명해졌다는 증거는 없다는 것이다. 수렵채집인들은 농업혁명 훨씬 전부터 자연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왜냐면, 사냥하는 동물들과 채집하는 식물들을 잘 알고 있어야 생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농부들은 대체로 수렵채집인들 보다 더욱 힘들고 불만스럽게 살았다. 수렵채집인들은 농부들 보다 더 활기차고 다양한 방식으로 시간을 보냈고 기아와 질병의 위험이 적었다. 농부들이 하루종일 쟁기질을 하는데 시간보내야 했던 것 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농업혁명 덕분에 인류가 사용할 수 있는 식량의 총량이 확대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여분의 식량이 곧 더 나은 식사나 더 많은 여유시간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인구폭발과 방자한 엘리트를 낳았다. 평균적인 농부는 평균적인 수렵채집인보다 더 열심히 일했으며 그 대가로 더 열악한 식사를 했다. 농업혁명은 역사상 최대의 사기였다.


이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한줌의 식물종, 밀과 쌀과 감자였다. 이들이 사피엔스를 길들였지 사피엔스가 이들을 길들인게 아니란 것이다. 


밀의관점에서 생각해보자. 1만년전 수많은 잡초중 하나 였던 밀이 지금 세계 거의 모든 지역에서 밀을 재배한다. 어떻게 이 잡초가 이렇게 번식할 수 있었을까? 밀은 호모 사피엔스를 자신의 이익에 맞게 조작함으로써 그렇게 해낼 수 있었다. 약 1만년 전까지 이 유인원 사피엔스는 사냥과 채집을 하면서 상당히 편안하게 살고 있었으나, 이후 밀을 재배하는 데 점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기 시작했다. 2천 년도 채 지나지 않아 전 세계 많은 지역의 인간은 동이 틀 때부터 해가 질 때까지 밀을 돌보는 것 외에는 거의 아무 일도 하지 않게 되었다. 


밀을 키우느라 사피엔스들은 등골이 휘었다. 찌는 태양아래서 잡초뽑고, 해충을 쫓아내고 개울에서 물을 끌어와애 했고 땅에 영양분을 공급하기 위해 동물들의 변을 모아와야 했다. 


사피엔스는 농업에 적합하게 진화한 종이 아니었다. 과일나무에 기어오르거나 동물을 쫓는데 적합하게 진화했는데, 농업이 이런 사피엔스들을 다르게 진화시켰다. 덕분에 척추와 무릎, 발바닥이 대가를 치렀다. 농업으로 이행 하면서 디스크, 관절염 등 수 많은 병이 생겨났던 것이다. 


사피엔스들은 밀밭 근처에 영구히 정착해야 했고, 이로써 이들의 삶은 영구히 바뀌었다. ‘가축화하다, 길들이다라’는 뜻의 단어 ‘domesticate’ 는 ‘집’이라는 뜻의 라틴어 ‘domus’가 어원이다. 즉, 밀이 집에서 사는게 아니다. 바로 사피엔스가 집에서 사는 것이다. 


밀은 어떻게 사피엔스로 하여금 어느 정도 만족할 만한 삶을 더 비참한 생활과 교환하도록 설득 했을까? 밀은 더 나은 식사를 제공한 것도 아니다. 인류는 아주 다양한 음식을 먹고사는 잡식성 유인원이다. 


밀은 인간 사이의 폭력에 대한 안전망을 제공한 것도 아니다. 수렵채집인 무리들은 강력한 라이벌에게 몰리면 다른 장소로 이동하면 되었다. 그런데 농부들은 일궈논 밭과 목초지를 잃는 것은 생사가 걸리 문제여서 타협의 여지가 적었다. 후퇴는 곧 곡물창고를 포기해야 한다는 뜻 이었으며, 많은 경우 이런 피난민들은 굶어 죽었다. 따라서 농부들은 그 자리에서 버티면서 싸워야 하는 폭력성을 키웠다. 


많은 인류학적, 고고학적 연구는 부락이나 종족을 넘어서는 정치적 틀이 없는 단순 농경사회에서 사망의 15퍼센트가 인간의 폭력 탓임을 시사한다. 남성의 경우엔 25퍼센트에 이른다. 오늘날 뉴기니를 보면, 농경 부족사회인 다니족에서 남성 사망의 30퍼센트가 폭력때문이고, 엥가족에서는 35퍼센트, 에콰도르 와오란족 성인의 약 50퍼센트가 다른 인간의 폭력으로 죽는다. 


시간이 흐르고 사회적 틀이 발전하면서 인간의 폭력은 통제를 받게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크고 효율적인 정치체제를 구축하는 데는 수천년이 걸렸다. 


밀이 준 것은 평범한 사피엔스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익보다 손해가 크다. 그러나 사피엔스 종에겐 식량생산단위를 크게 늘려주었고 사피엔스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마을은 커졌지만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과거보다 많은 사람이 질병과 영양실조로 허덕였다. 


그럼 어느 종이 성공적으로 진화 했는가? 더욱 많은 사람들을 더욱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 있게 만드는 능력, 이것이 농업혁명의 핵심이다. 농업혁명의 덫이었다.



사치라는 덫


농업은 수백 수천 년에 걸쳐 서서히 발생했다. 버섯과 견과류를 채취하고 사슴과 토끼를 사냥하던 호모 사피엔스의 한 무리가 어느날 갑자기 마을에 영구히 정착해서 밭을 갈고 밀씨를 뿌리고 강에서 물을 끌어오게 된 것이 아니다. 사피엔스들이 밀을 점점 많이 먹게되고 그 과정에서 밀이 번식하는데 무심코 기여했다. 


밭에서 잡초를 뽑고 기생충을 막아주고 물을 대고 비옥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곡물 경작에 더 많은 노력이 집중되면서 야생 동식물을 사냥하고 채집할 시간은 줄어들었다. 수렵채집인이 농부가 된 것이다. 


밀과 함께 영구히 정착한 사피엔스들의 기원전 8500년때의 삶은 기원전 13000년의 사피엔스들의 삶에 비해 더욱 힘들었다. 역설적이게도 일련의 ‘개선’이 합쳐져서 농부들의 어깨에 더 무거운 짐으로 얹혀진 것이다. 출생률은 사망률을 앞질러 사람들은 이전보다 아이를 더 많이 낳았다. 추가로 생산된 밀은 숫자가 늘어난 아이들에게 돌아가야 했다. 초기 농부들이 예측하지 못한 것이었다. 모유보다 죽을 많이 먹이면 면역력이 약해져 질병이 생긴다는 사실도. 곡물창고를 지키려면 보초를 서야 된다는 사실도 예견하지 못했다. 


좀 더 쉬은 삶을 추구한 결과 더 어렵게 되어버린 셈이다.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대학졸업한 젊인이가 돈 많이 벌어 35세에 은퇴해서 진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겠다고 다짐하면서 유수한 회사에 들어가 힘들게 일한다. 그러나 막상 그 나이가 되면 주택융자와 대출이 늘어가고 이들은 노력을 배가해서 노예같은 노동을 계속 한다는 것이다. 


역사에 몇 안되는 철칙 가운데 하나는 사치품은 필수품이 되고 새로운 의무를 낳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일단 사치에 길들여지면 사람들은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 다음엔 의존하기 시작하고 마침내는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는 지경이 된다. 


지난 몇십년간 우리는 시간을 절약하는 기계를 무수히 발명했다. 세탁기, 진공청소기, 식기세척기, 전화, 컴퓨터, 이메일…..이들 기계는 삶을 더 여유있게 만들어줄 것이라고 예상되었다. 과거엔 편지를 주고받는데 며칠, 몇주가 걸렸지만 지금은 몇분후에 답장을 받을 수 있다. 과거의 모든 수고와 시간을 절약했다. 하지만 내가 좀 더 느긋한 삶을 살고 있는가? 우리는 시간을 절약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인생이 돌아가는 속도를 과거보다 열 배 빠르게 만들었다. 그래서 우리의 일상에는 불안과 걱정이 넘쳐난다.


인류가 좀 더 편안 한 생활을 추구한 결과 막강한 변화의 힘이 생겼고 이것이 아무도 예상하거나 희망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세상을 변화시켰다는 점이다. 이것이 사치품의 함정이다. 



혁명의 희생자들


인간과 곡물과의 거래가 우리 인간종의 유일한 거래는 아니었다. 양, 염소, 돼지, 닭과 관련해 또 하나의 타협이 이루어졌다. 야생 양을 뒤쫓아 유랑하던 사피엔스 무리는 자신들이 잡아먹는 양 집단의 구성을 점차 변화시켰다. 이 과정은 아마 선별적 사냥으로 시작되었을 것이다. 처음엔 다 큰 양이나 늙고 병든 양만을 사냥하는게 유리하다는 점을 배웠을 것이고, 이후 그 지역의 양 떼가 장기적인 활력을 유지하도록 임신가능한 암컷과 어린 양들은 잡지 않았다. 다음은 인간의 라이벌인 사자와 늑대들이 사피엔스들의 식량인 양을 먼저 훔쳐가지 못하도록 양들을 보호하는 것 이였고, 그 다음은 통제와 보호가 쉽도록 양 떼를 좁은 골짜기에 몰아넣고 울타리를 치는 것 이엇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피엔스들은 자신들의 필요에 꼭 맞는 양을 만들기 위해 가장 공격적인 양을 먼저 도살하는 것이었다. 세대가 거듭할 수록 양들은 순하고 호기심이 줄어들었다. 가축화되고 순종적인 양떼가 된 것이다.


이렇게 가축화된 양, 닭, 당나귀 등은 식량, 원자재, 근력을 공급했다. 이제껏 인간의 힘으로 해오던 수송, 쟁기질, 곡식빻기 등을 동물에게 넘기게 된 것이다. 대부분의 농경사회에서 사람들은 식물 재배에 주력했고, 동물을 키우는 것은 2차적 활동이었다. 하지만 어떤 지역에서는 동물 착취에 기반한 새로운 종류의 사회가 등장했는데, 바로 묵축민 부족이었다. 


인류가 세상에 퍼지면서, 이들이 가축화한 동물도 함께 퍼졌다. 지금 지구에 가장 널리 퍼져있는 대형 포유류를 순서대로 꼽으면 사람이 첫째고, 2,3,4위가 가축화 된 소, 돼지, 양이다. 


불행하게도 진화적 관점은 성공의 척도로서는 불완전하다. 그것은 모든 것을 생존과 번식이라는 기준으로 판단할 뿐, 개체의 고통이나 행복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가축이 된 닭이나 소는 아마도 진화적 성공의 사례이겠지만, 역사상 가장 비참한 동물인 것도 사실이다. 양 떼의 입장에서 보면, 대다수의 가축화 된 동물에게 농업혁명은 끔찍한 재앙이였을 것이다. 이들의 진화적 ‘성공’은 무의미하다. 아마도 좁은 상자 안에 갇혀서 살을 찌우다가 육즙이 흐르는 스테이크가 되어 짧은 삶을 마감하는 송아지 보다는 멸종 위기에 처한 희귀한 야생 코뿔소가 더 만족해 할 것이다. 


진화적 성공과 개체의 고통 간의 이런 괴리는 우리가 농업혁명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일 것이다. 우리가 밀이나 옥수수 같은 식물의 이야기를 조사할 때는 순수한 진화적 관점이 타당할 지 모른다. 하지만 소나 양, 사피엔스처럼 각자 복잡한 기분과 감정을 지닌 동물의 경우, 진화적 성공이란 것이 개체의 경험에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사피엔스 종이 집단적으로 힘을 키우고 외견상 성공을 구가한 것이 개개인의 큰 고통과 나란히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거듭확인하게 될 것이다.


20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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